천운영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
“나는 오래 쓸 것이다.”
소설집 『반에 반의 반』2023의 ‘작가의 말’은 짧고 단호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오래 쓰겠다는 이 각오를 격려하는 제56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식은 소설가 천운영을 무척 기쁘게 했다. 이 소설집까지의 길이 여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주는 격려를, 축하의 인사들이 건네는 순정한 기쁨을 더욱 크게 느꼈다. 2000년에 등단한 뒤 24년이 흘렀고, 마지막 소설책으로부터는 10년이 지났다.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반에 반의 반』은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늙은 여자의 젖통”임을 발견하는 결과물이고, 천운영의 ‘앞으로의 20년’을 낙관적으로 기대하게 하는 보고다. 여성에 관해 쓰는 작업이 여성의 삶을 듣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당연한 인지의 시간은 천운영에게 남극 다큐멘터리와 함께, 양팔에 화상을 덧입히는 식당 부엌에서의 시간과 함께,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대학원 연구실에서의 시간과 함께 도달했다. 묵묵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던 천운영의 지난 10년이 사실 얼마나 많은 말과 삶, 극지방 체험과 불 앞에서의 의무감으로 점철됐는지 들으면서 그가 앞으로 오래 쓸 소설을 기대하게 되었다. 격려라는 말 없이도 격려받는 것 같던 그 대화의 자리를 여기 나눈다.
생물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고, 남극에 세 번 다녀오셨어요. 다큐멘터리 촬영을 했고, 10년 만에 소설집을 내셨습니다. 천운영 작가님의 하루 혹은 일 년의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나요. 10년 단위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최근 10년 정도 다른 일을 많이 했거든요. 스페인을 돌아다녔고, 스페인 가정식 식당을 운영했고, 남극에 세 번을 갔고, 대학원에 진학했죠.
이 사이에서 모색해오지 않았나 싶은데, 남극과 공부가 제게 길잡이가 돼주었어요. 앞으로 10년은 소설만 쓸 텐데, 제가 석사 학위논문을 아직 못 썼거든요. 연구 자료는 수집했는데 논문을 써야 할지 지도교수님께 여쭤봤더니, 이 분야를 이렇게까지 공부한 소설가가 어디 있겠느냐며 “생태소설을 써주셔야죠”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화를 써서 여기저기 공모에 내놓기도 했어요.
최근 10년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셨다는 점에서, 그 10년이 끝나고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시점에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으셨어요. 책 낼 때는 걱정이 많았어요. 동료 작가들은 되든 안 되든, 좋든 나쁘든 끊임없이 써왔잖아요. 계속 쓰다가 소설이 좋으면 상도 받고 그런 거였는데, 저는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었죠. 딴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쓰는 게 소설이 맞나, 이런 소설이 읽힐까, 나는 변했나 안 변했나, 답습하고 있나… 이런 불안을 느끼며 책을 냈어요. 그런데 책을 내고 나니 정말 좋았어요. 나아졌다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거든요. 잘 나이 들고 있다는 느낌이요. 등단작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지점에 도달했다고요. 그런데 상을 받았죠. 좋았어요, 진짜.
작가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온 독자 입장에서도 무척 기쁜 일이었어요. 우리는 이제 물러나는 세대야, 라는 느낌이 강한 상황에서 ‘이렇게 계속하면 인정받는구나’ 하고 독자분들도 같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동료 작가들도요. 축복받으면서 상을 받는 기분이 참 좋았죠.
『반에 반의 반』을 쓰시는 동안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10년 만에 소설집을 내면서 내가 감을 잃었나,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이 시대에도 유효한가 하는 불확실성이 있었을 텐데요. 심했죠. 그동안 계속 달렸으면 그 동력으로 가는데, 그것이 없고.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저의 시각, 표현 등을 꼼꼼히 되짚으면서 소설집을 마무리했어요.
그런 고민이 들 때 판단하는 기준이 있을까요? 그 과정에서 배운 게 있죠. 옳고 그르고 논리적이고 아니고를 이성적으로 여러 번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두고 마음속에서 굉장히 고요한 순간을 만들어요. 소설이 그 고요 속에서 흐르는지 아닌지를 두고 봤어요. 흘러가다 멈칫거리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봐야 하는 게 분명했고요, 멈칫거리지 않았어도 ‘너무 좋아’ 하는 부분 역시 의심해 볼 만했어요.
넘쳐도 부족해도 안 되는 셈이네요.
내 욕심과 욕망을 알아보는 노력, 이야기 자체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야기를 독립된 생명으로 삼아 제가 이야기를 듣는 훈련을 많이 한 셈이에요.
생태소설의 태도인데요. 네. 제가 공부를 한 게 도움이 된 건 그런 측면이더라고요.
그 맥락에서 이야기해보면, 내레이션이 적극적으로 실린 소설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생각을 말로 길게 전달하는 구성이요. 등장인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가능한 온전하게 옮기고 싶어 하는, 연출을 가능한 줄이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거든요. 예전에는 조작하고 만들고 연출을 최대한 잘해야 소설이었는데, 지난 10년 동안 제 머릿속에는 ‘잘 들을 것’만 있었어요. 잘 듣고 다 모은 뒤 재배치했을 때 보이는 문양을 생각할 것. 잘 들어주고 들려주자. 삶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민하신 지점이 작가로서 더 많이 통제하고 싶은지 혹은 그 반대로…. 정확해요.
그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믿어왔던 소설의 형식과 내용과 세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과 다른 형태와 목소리를 찾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했는데요. 결론은 이거예요. 저도 늙어가잖아요. 내 몸이 나이 들어가니 내 몸에 맞는 목소리가 필요하다고요. 젊은 몸의 목소리가 있었고, 이제는 그걸 몰아붙이기보다 내 몸에 맞는 목소리로 바꾸자고 생각했어요. 실은, 이전 방식은 재미가 없어졌어요. 고민이 많았지만 힘을 빼고 배영하듯이 제 몸에 맞는 목소리를 10년 만에 찾은 것 같아요. 더 나이 들면 어떤 목소리를 찾을지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확신은 있어요. 앞으로 10년간은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겠구나, 하는 자신감.
돌아보면 지난 10년은 몸 쓰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 셈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시간이기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정말 힘들었지, 힘들었네. 남극은 진짜 추웠고, 식당도 힘들었죠. 그런데 힘든 건 기억이 안 나요. 식당 하면서 팔뚝 안쪽이 전부 화상 자국이었거든요. 상처가 아물면서 살이 조금 두꺼워지듯, 몸을 써서 몸을 바꾸는 시간이었어요. 몸을 써서 몸을 바꾸니 태도가 바뀌고, 정신이 바뀐 셈이죠. 제가 서른 살에 등단했잖아요. 30대, 40대는 정말 날카롭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누가 그랬거든. 송곳 같다고. 주먹 쥐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 같았다는 거죠. 그런데 식당을 하면서 내가 나를 세우고 내 속에서 다정함을 끄집어내서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걸 생물학 공부를 하면서도 배웠고요.
천운영은 2018년 3분기와 2020년 하반기 연희문학창작촌 입주작가로 이곳에 머물렀다
몸을 쓴다는 감각이 소설에도 녹아 있어요. 취재를 많이 하고 쓴 글로 읽었거든요. 노령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사를, 숱한 갈래의 개인사를 소설 안에 잘 부려놓으셨더라고요. 목표가 있었어요. 요즘 노령의 여성을 얘기하면 특별한 사람을 보여주려는 것 같아요. 저는 일상적으로 살아온 삶을, 그냥 살아온 사람의 특별함을 통해 사회를 읽어보고 싶었어요. 저희 엄마, 돌아가신 할머니, 친구의 엄마 등 수많은 어머니들을 지켜보면서 그 작업에 욕심이 생겼어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우리의 특별함은 땅처럼 단단하게 존재하는 데서부터 온다고요.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눈에 띈 점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연대’를 말하기보다 ‘연결’을 말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한,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구나 싶은 세계관이요. 연대보다 연결이라는 말이 더 와닿았어요. 조용히 손잡아주기, 살짝 안아주기,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 한 공간에서 살기, 상대의 날숨을 들이쉬는 거리에 존재하기…. 이렇게 서로서로 보듬기 시작하면 더 큰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조금 더 나은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동화를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소설집은 할머니 연작 소설집 같은 느낌도 있거든요. 두 가지가 다른 듯 맥이 통하는 듯해요. 할머니와 손녀, 할아버지와 소년의 조합은 안 망하는 이야기예요. 왜일까 싶었더니 이들이 맞아요. 정말 대화가 되는 거죠. 이 두 세대가 만나서 얘기를 풀어나가면 진실에 더 가까워지거든요.
단편 「아버지가 되어주오」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이럴 땐 꼭, 느이 아빠구나, 딱, 네 아빠야.” 하는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저 가부장제의 피해자로만 보는 딸에게 “넌 네 엄마 인생이, 그렇게 정리되면, 좋겠니?”라고도 하고요. 모녀 이야기가 딸의 입장에서 창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한계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도 했고요. 정말 엄마가 말하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듣게 될까? 그런 궁금증이 들었어요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에선 최대한 개입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소설가의 입장으로 혹은 2세의 입장으로 생각하는 것을 최대한 하지 말아보자고. 엄마를 부정하거나 끌어안거나 불쌍해하는 식 말고, 무엇이 가능할까 하고요. 이런 건 제가 식당을 하면서 엄마와 2년간 매일 보면서 알게 된 거예요. 처음으로 매일 긴 시간 딱 붙어서 엄마를 관찰하게 됐죠. 그런데 제가 아빠처럼 굴고 있더라고요.
내가 사장이라는 이유로 엄마한테 명령하고. 엄마가 그걸 다 버티다가 저한테 한 한마디가 “너는 딱 니 아빠다”였어요. 그 순간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싶었어요. 내가 엄마를 독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내 기준에 맞춰 이야기를 골라 듣지 말고 정말 잘 들어야겠구나 했어요.
어머니 이름을 딴 ‘명자’라는 이름은 이번 소설집에 몇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사람들이에요. 이처럼 이번 책에는 이름이 같은데 다른 삶을 살아온 여성들이 등장한단 말이에요. 같은 사람인가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고요. 처음에 편집자가 원고를 보고는 연작소설집인데 연도가 안 맞는다고 전부 고쳐왔더라고요. 연작인 듯 연작 아닌 소설들인데 말이죠. 엄마 이름이 명자인 사람이 저 말고도 제 주변에 너덧 명 있어요. 우리 세대에는 선영이, 지영이가 있고요. 이름만 보고도 어떤 세대인지 약간은 짐작할 수 있죠. 기길현이라는 이름은 할머니 이름에서 따왔고요. 저희 엄마는 이제 경도 인지성 장애 상태거든요. 언젠가는 기억이 사라질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엄마 이야기를 최대한 더 듣자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고요. 내가 소설가니까 당신의 이름을 멋진 여성의 대명사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어요.
여러 일을 거치면서 삶의 부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생각도 전과 달라지셨을 듯해요. 식당을 열고 남극에 다녀오면서 내가 도망간 건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건지 당시에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어요. 분명한 건 소설에서 도망친 건 맞아요. 그런데 제 안에 다른 물을 넣어야 한다는 직감은 분명히 있었죠. 저는 원래 그래요. 경험한 만큼 정직하게 나오더라고요. 그 모든 시도가 소설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지만, 그게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몰랐죠. ‘식당을 열어야겠어, 밥 좀 해 먹여야겠어’라는 생각은 몸의 목소리였던 것 같거든요. 제가 말하는 ‘순리대로’라는 건 제게 필요했던 것을 충실하게 따른다는 뜻이기도 해요. 식당을 운영하면서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서 소설을 쓸 수가 없었는데요. 쓰고 싶더라고요. 제가 소설을 좋아하더라고요.
10년 단위로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음 10년, 20년을 생각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데요. 잘 산 인생, 못 산 인생을 갈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소설 속 할머니들이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굉장하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도요. 『반에 반의 반』에 실린 소설들이 그래서 좋았어요. 남극 같은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 이런 시간 개념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고요. 소설 쓰고 공부하면서 잘 살고 싶어졌어요. 소설을 잘 써야지, 하는 욕망과는 다르죠. 좋은 생명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 제가 남극에 세 번 갔어요. 처음에는 예술가 체험단으로 2주간 가 있었어요. 두 번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한 달 가 있었고요. 2년 전에 갔을 때는 연구자로 간 거라서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썼어요. 팬데믹 때문에 배편도 얼마 없어서 3개월을 꽉 채워 있었고요. 처음 두 번은 세종과학기지로 갔는데, 연구하러 갈 때는 장보고과학기지로 갔고요. 다르더라고요. 정말 좋았어요. 진화생물학 중 동물행동학, 또 더 들어가서 동물의 성격 차이에 대해서 연구해요.
종과 개체의 특성이 있는데, 개체의 특성에 따른 행동 차이에 대해서요. 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소설 같기도 해요.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인간이 100년을 살아도 짧은 시간이잖아요. 잘 살다가 돌아가는 이 순환에, 한 줌 먼지로서 잘 살고 싶어요. 생태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건 그런 욕망이에요. 제가 좋아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 : A Story of Loss, Love, and the Hidden Order of Life』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The Unwomanly Face of War』 같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는 글을 생태학적인 접근을 통해 써 보고 싶어요. 앞으로의 20년은 그렇게 보내게 될 것 같아요.
글 씨네21 기자 이다혜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