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두 번째 출연작 <오아시스>로 200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사실을 상기해보면, 문소리가 일찍부터 신체의 언어를 잘 활용해온 배우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다. <바람난 가족>에서 전직 무용수였던 주부 캐릭터를 맡으며 현대무용을 처음 접하고, 무용을 하면서 치유를 경험하고, 그러다 무대 공연이 주는 재미를 알게 된 과정은 퍽 자연스럽다. 나이를 먹어서도 무대에 멋있게 서기 위해 무용으로 몸을 관리하고, 공연을 통해 예술적 자극을 받아 다시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이 순환의 과정 역시 아름답다. 지난해 <여배우는 오늘도>를 선보이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도 모자라 영화, 방송, 연극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관심 분야를 넓히고 있는 문소리를 만났다.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제37회 국제현대무용제(International Modern Dance Festival, 이하 모다페)를 앞두고 그녀의 예술적 관심사를 함께 나눴다.
요즘 부쩍 다방면에서 얼굴을 보는 것 같아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다, 내가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을 하다 보면 마음대로 안 풀릴 때도 있고 내 욕심이 다 채워지지 않아 혼자 안달복달할 때도 있는데, 지금은 어떤 성과나 남들의 평가에 상관없이 그동안 내가 공부했고 또 애정을 가져왔던 것들을 가지고 재밌게 이것저것 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모다페의 홍보대사로 위촉됐는데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바람난 가족>에서 전직 무용수인 주부 ‘호정’을 연기한 적이 있어요.
<바람난 가족>을 준비하면서 처음 현대무용과 인연을 맺게 됐어요. 당시 안애순무용단과 거의 두 달을 같이 보냈죠. <바람난 가족> 직전 작품이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였는데,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를 연기하는 동안 몸이 많이 틀어져 고생을 꽤 했어요. 골반도 틀어지고, 턱 관절과 경추도 안 좋아지고. 그런데 <바람난 가족> 준비하느라 현대무용을 배우니까 몸문화인이 좀 덜 아픈 거죠. 그때부터 무용을 쭉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그러진 못했어요. 한동안 작품하느라 현대무용과 멀어졌죠. <오아시스>와 <바람난 가족>을 연이어 하니까 몸 쓰는 게 지긋지긋하더라고요. 이후 출산도 하고 작품 준비를 하면서 이런저런 운동을 했는데 나에게 잘 맞는 운동을 찾는 게 어렵더군요. 기계나 도구가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피트니스 센터도 자주 안 가게 되고. 그러다 2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현대무용을 응용한 탄츠플레이를 배우게 됐어요. 탄츠플레이는 현대무용에 발레와 필라테스를 접목한 운동인데, 우선 도구를 많이 활용하지 않아서 좋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것도 좋았어요. 운동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어요. 어깨 통증이 심했는데 그 통증이 사라졌어요. 원래 홍보대사라는 직함의 일은 맡지 않으려는 편이에요. 내가 홍보대사를 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 홍보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모다페의 경우도 홍보대사 제의를 받았을 때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번 모다페의 개·폐막 공연이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개·폐막작의 티켓은 구하기도 어렵고 어차피 홍보대사직을 맡지 않더라도 다른 공연들을 보러 갈 텐데, 그러면 홍보대사로 공연도 보고 무용제도 알리면 좋겠다 했던 거죠. (웃음)
개막작은 게코(Gecko)의 <웨딩>(The Wedding)이고 폐막 공연은 NDT2(네덜란드댄스시어터)가 장식합니다. 두 공연에 어떤 기대가 있나요?
게코는 세계적인 영국 피지컬시어터컴퍼니예요. 그래서 연극제에서도 초청하고 싶어 하는 팀이죠. 작품을 보면 무용 같지 않아요. 움직임과 함께 이미지와 내러티브가 있어요. 드라마가 있는 한 편의 연극같이 느껴지죠. <웨딩>은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공연이라 저도 궁금해요. NDT는 작품마다 파격적이고 새로운 걸 보여주기로 유명한 팀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NDT의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요, 모다페 폐막식에선 NDT의 젊은 무용수 그룹 NDT2가 <슬픈 사례>(Sad Case), <선인장>(Cacti), <나는 새로 그때>(I New Then) 세 작품을 공연해요. 그들의 공연을 본 적이 없어서 기대가 커요.
음악 공연보다 무용이나 연극 공연을 선호한다고 했잖아요. 몸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무용은 관객에게 더 적극적인 해석을 요할 것 같은데요.
어렵고 복잡한 주제를 전달하는 무용도 있죠. 영국의 DV8 피지컬시어터 같은 경우 무용수들이 복잡한 주제를 끊임없이 말로 전달해요. DV8은 2012년 국내에서도 <캔 위 토크 어바웃 디스?>(Can We Talk About This?)라는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무용수들은 말과 움직임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죠. 이들의 공연을 보면 무슨 기인열전을 보는 것 같아요. (웃음) 어쨌든 일반적인 무용 공연은 이미지가 중심이고 상징적이죠. 그래서 시적이에요. 그런데 시가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더 간결하고 직관적인 경우가 많아요. 그런 것들을 즐기는 재미가 있어요.
1 문소리 배우의 감독 데뷔작인 <여배우는 오늘도> 메이킹 현장.
2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3 문소리 배우가 처음 현대무용과 인연을 맺게 된 영화 <바람난 가족>.
4 연극 <빛의 제국> 무대 모습.
실제 무용 실력은 어떤가요? 무용에 소질이 있다는 얘길 종종 듣나요?
가동성, 유연성은 괜찮은데 리듬감이 그리 좋지 않아요. 오히려 무용을 통해서 신체의 부족한 점을 채우게 되는 것 같아요. 바른 자세로 생활한 적이 거의 없어서 몸의 균형이 많이 틀어져 있었는데 무용을 하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고 중심을 잡게 됐어요. 그런데 무용하기에는 발이 작고 약해요. 무용은 안정감 있게 발로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한데 발이 크지 않아서 단단하게 버티질 못해요. 그래도 50살, 60살 넘어서까지 무대에 서려면 무대에서 몸을 잘 쓸 수 있도록 관리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배우의 몸은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운동을 하지 않은 몸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근육이 붙은 몸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때그때 캐릭터에 맞게 몸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기에도 무용이 좋은 것 같아요. 딸한테도 무용을 배우게 하고 싶은데 아이들의 무용 교육은 발레가 거의 유일해요. 발레 말고는 다른 춤이 없어요. 한국에서 춤은 이상하게 부끄러운 거예요. 남들 앞에서 춤추는 걸 부끄럽다고 생각하죠. 춤이 우리의 삶에서 분리된 게 안타까워요.
지난 4월에는 이란 출신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의 연극 <낫심>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매회 다른 배우가 무대에 서고, 배우는 무대에서 처음 대본을 받아 극을 이끌어가는 일종의 실험극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됐나요?
일단 궁금했어요. 대체 어떤 작품인지. 그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공연을 보러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배우들이 한 번씩밖에 무대에 서지 않으니까 표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죠. 그래서 이번에도 궁금하니까 내가 직접 해보자 했던 거예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을 다루는 공연이에요. 대단한 볼거리나 내용이 있는 건 아닌데 주제의 전달 방식이 흥미로웠죠.
리허설이 없는 1인 즉흥극이라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배우가 준비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러니 괜히 긴장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어땠나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시키겠지 설마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겠어?’라고 생각해서인지 긴장은 안 되더라고요. 공연 관계자도 그러더군요. 다른 배우들과 달리 너무 편안해 보인다고, 너무 긴장을 안 한다고. 무대에 오르기 전엔 적당한 긴장과 이완이 필요해요. 이번엔 리허설이랄 게 없었으니 대기실에 요가매트 깔아놓고 몸 풀다가 올라갔어요. 무대에 올라가면, 스크린에 텍스트가 뜨고 배우는 그걸 계속 읽어나가요. 페르시아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데, 익숙하지 않은 읽기 방향에도 금방 적응하더라고요. 생각보다 내가 읽기를 잘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너무 실수를 안 해서 공연 보러 온 남편(영화감독 장준환)이 사전에 대본을 보고 무대에 오른 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어요. 공연이 끝난 후 원작자 낫심도 저에게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적 있느냐고 물어봤고요. 발음도 정확하고 술술 읽으니까. 너무 즉흥의 맛을 못 살린 건가 싶기도 했죠. (웃음)
평소 실험극에 애정이 있어서 챙겨 보는 편인가요?
챙겨 보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새로운 공연이 있으면 보고 싶죠. 영화는 나중에 다시 찾아볼 수 있지만 공연은 그때가 아니면 못 보니까요. 그런데 연극의 경우 고전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무대야말로 설사 어설프다하더라도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연극 <빛의 제국>도 형식이 좋았거든요.(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2016년 문소리의 6년 만의 무대 복귀작이었다. 2017년엔 <빛의 제국>으로 프랑스 3개 도시에서 투어 공연을 진행했다.) 가장 돈을 적게 들이면서도 가장 파격적일 수 있는 곳이 무대라고 생각해요. 무대에서는 뭐든 새로운 게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이런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고 그런 시도들을 많이 보고 싶어요.
배우 문소리를 세상에 알린 데뷔작,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도 지난 4월 26일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했습니다. <박하사탕>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어마어마한 걸로 알고 있어요.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또 한바탕 눈물을 쏟았죠?
영화가 시작되면 까만 화면에 하얀 점처럼 터널 입구가 보이고 ‘따리라라~’ 하고 음악이 나와요. 그러면 벌써부터 눈물이 나요. ‘이제는 괜찮겠지’ 하면서 봤는데 또 통곡을 했어요. 옆자리 관객에게 방해될까봐 울음을 꾹꾹 눌렀더니 가슴이 또 너무 쑤시는 거죠. 그러다 기찻길 장면이 나오면 또 눈물이 터지고. ‘관객과의 대화’ 한다고 속눈썹도 붙이고 갔는데 우느라 다 떨어져버렸어요. (웃음) 영화의 주인공 ‘영호’(설경구)의 삶이 많이 변하는데, 마찬가지로 내 삶 또한 변했다는 걸 느껴요. 지켰어야 했는데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들이 있고, 어리석었던 순간들이 있고, 흔들리면서 갈피를 못 잡은 적도 있고, 나쁜 마음을 먹은 적도 있고. 그런 생각이 막 밀려들면서 내가 지금 똑바로 살고 있나 하는 질문을 마주하게 돼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 너무 사무치게 그리워져요. 영화가 시작되면 그렇게 정체를 알 수 없이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슬픈 감정이 밀려와요. 아직 <박하사탕>이란 영화에 대해 면역력이 생기지 않은 모양이에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정말 깊은 영화고, 그런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님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박하사탕>을 찍을 당시의 26살의 문소리는 지금보다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소극적이었다고요.
맞아요. 인터뷰할 때도 가만히 구석에 앉아서 설경구 오빠는 어떻게 말하나 지켜보고 있었어요. 누가 말 시키면 당황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컸죠. 고등학교 다닐 땐 학교와 집밖에 몰랐어요. 명동에 한 번도 안 가봤을 정도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죠. 그래서 <박하사탕>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두려웠어요. <박하사탕> 제작보고회 때였나. 영화인들과 기자들이 굉장히 많이 모인 자리였는데 그때 김여진 배우가 데킬라를 시켜서 술에 불을 붙여 마시더라고요. 그거 보고 기겁했어요. 사람들이 양주를 마시는 것도 신기했는데 술에 불까지 붙이다니. 그야말로 문화충격이었죠. (웃음)
현재 드라마 촬영 중입니다. 곧 드라마와 영화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라이프>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어요. 7월 말 방송 예정이고 의학드라마예요. 신경외과 과장 역인데, 30개가 넘는 의학 전공 중 제일 어렵고 힘든 과가 신경외과라고 해요. 수술 한 번 들어가면 10시간이 넘는 건 기본이니까요. 그런 험한 분야에서 과장까지 된 인물이에요. 드라마 <비밀의 숲>을 썼던 이수연 작가 작품이고, 조승우, 이동욱 배우 등이 출연해요.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영화 <어쩌다 배심원> 촬영에 들어가요. 거기선 판사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최근에 김영란 전 대법관도 만났어요. <박하사탕>땐 구로공단의 노동자였는데 이제 곧 대통령 역할도 맡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웃음)
- 글 이주현
- 씨네21 기자·사진 최성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