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지가 전하는 한국 발레를 향한진심
1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역사 도시 교토에서도 고풍스러운 바닷가마을 마이즈루舞鶴. 지금도 마이코舞子들이 어딘가에서 열심히 일본 전통춤을 계승하고 있을 그곳에서 1959년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난 한 소녀는 생뚱맞게 발레를 배웠다. 훗날 대한민국에 발레 르네상스를 일으킬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까.
국립발레단을 무려 12년간1996~2001, 2008~2013 이끌어 수많은 무용수의 ‘영원한 스승’으로 통하는 최태지 전 단장 얘기다. ‘오타니 야스에’라는 이름으로 교토의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와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를 거쳐 일본에서 잠시 활동했지만, 한국으로 건너와 ‘최태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새로운 운명이 펼쳐진다. 아니, 국립발레단의 운명과 시너지를 내며 동반 상승하게 된다.
1983년 <세헤라자데> 객원 주역 무용수 신분으로 조심스레 국내 무대를 밟았지만, 뛰어난 미모와 실력을 뽐내며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노트르담의 꼽추> 등의 주역을 줄줄이 꿰찼다. 두 아이를 기르며 활동한 최초의 ‘엄마 발레리나’였고, 1996년 37세에 최연소 국립발레단장에 취임해 한국 발레의 명품화와 대중화를 거침없이 일궈낸 파이어니어pioneer다. 최태지의 발자취가 한국 발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겼지만 ‘발레계 대모’답게 여전히 반짝반짝 아름다운 그녀를 만났다. 최강 동안으로 “9월이면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다”며 깔깔 웃는 모습에 심한 인지 부조화가 느껴졌지만, 한국 발레 최전선에서 40여 년을 보낸 후에야 선뜻 꺼내 보일 수 있는 ‘예술가의 진심’은 의심할 수 없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전통춤의 도시에서 소녀
야스에가 발레를 시작한 아홉 살 때로 날아갔다.
첫 여행지부터 흥미진진했다. 엉뚱한 선택이
아니라 그곳에 살았기에 발레를 하게 된
셈이라는데, 초장부터 일본의 문화적 저력을
확인하게 됐다. “마이즈루舞鶴는 ‘학이 춤춘다’는
뜻인데, 그래서 춤추는 인생이 시작됐나봐요.
산과 바다가 보이는 지방의 작은 도시였지만,
일본 최초로 <백조의 호수> 주역을 했던 프리마
발레리나 가이타니 야오코 선생의 연구소가
있었어요. 도쿄에 본부를 두고 지방 곳곳의
지부를 선생님이 순회하는 시스템이었죠.
1968년에 이미 발레가 대중화돼 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던 저는 언니를 따라갔는데,
연구소의 작은선생님이 너무 예뻐서 반했죠.
일 년에 두 번씩 각 지부 학생들이 모여 합숙할
때마다 잘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나도 빨리
토슈즈를 신으려 욕심을 부렸어요. 시골 살던
내가 세련된 선배들을 만나고 외국 발레단 얘기
들으면서 꿈을 키울 수 있었죠.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발레의 매력에 빨리 눈뜨지 못했을
거예요.”
발레의 본향인 프랑스에 유학하러 갔을 땐
스스로에게 실망도 했단다. 일본에서 잘한다는
소리만 들으며 한껏 부풀어 있던 콧대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서양인들 앞에서 납작해진
것이다. “최고 교육을 받겠다고 간 프랑스에서
포기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때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예술은 돈으로 살 수 없다’며
격려해주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멋지게 들렸고,
꼭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죠. 루돌프 누레예프가
연습하러 오던 스튜디오를 다녔으니, 많이
배웠어요. 파리오페라발레 무용수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절로 공부가 됐죠.”
한국으로 건너와 국립발레단 문을 두드린
1983년, 아직 우리 발레 수준은 일천했다. 하지만
‘아이덴티티를 찾아야 하는 시기’였던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장이 됐다. “일본에서 처음
전막으로 <백조의 호수>를 올린 조선 출신 무용가
시마다 히로시 선생님의 권유로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 가면 일본에도 없는 국립발레단이
있다’며 당신의 제자인 임성남 초대 단장님께
저를 보냈죠. 당시 발레단 수준이 낮았던 만큼
저 역시 같이 공연하면서 함께 발전할 여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한국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좋은 토슈즈나
의상도 같이 나눴으면 했던 거죠. 돌아보면
시마다 히로시 선생과 임성남 단장의 만남이
있던 덕에 저와 국립(발레단)도 만날 수 있었어요.
결국 만남이 중요한 거죠.”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한국 활동이
마냥 수월했던 건 아니다. 문화적인 차이에
당황하는 일도 많았지만, 매사에 ‘긍정의 힘’을
발휘해 이겨냈다. “밥 먹었냐, 얼굴이 왜 안 좋냐,
그런 질문을 듣는 게 처음엔 이상했어요.
‘물도 안 먹는 발레리나에게 왜 밥 먹었냐 묻지?’
‘일본에선 얼굴이 안 좋으면 피해주는데 굳이
왜 물어보지?’ 거부감이 들었죠. 그때만 해도
탈의실에서 남의 수건을 막 가져다 쓰기도
했는데, 놀랍고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이제
그런 게 정답게 느껴질 정도로 나도 많이 변했죠.
요즘 일본에 가면 답답해요.(웃음) 돌아보면
일본의 고도 성장기에 학교를 다니고, 한국의
고도 성장기에 활동한 나는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 언니는 조상들이 홀로 한국에 온
나를 돌봐주는 거라고 했는데, 그래선지 나쁜
일이 생겨도 금세 털고 다시 일어나곤 했죠.
‘지하철 공짜 나이’가 되고 보니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웃음)”
따지고 보면 발레리나로서의 활동은 길지 않았다.
1984년 <백조의 호수>를 마치고 결혼해 뉴욕으로
떠날 때만 해도 발레를 관둘 생각이었다. “그때
토슈즈 던지고 속시원했어요. 사실 음악 속에
있을 때나 행복하지, 평소엔 외로웠거든요.
늘 선배들과 나란히 활동하니 친구들 사이에선
왕따였으니까요. ‘발레의 신이 너를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이 듣기
싫었지만 결국 그랬어요. 산후우울증을 겪다가
찾아간 브로드웨이의 스튜디오에서 새삼 발레의
재미를 느꼈죠. 78킬로그램으로 불어난 몸에서
6개월 만에 30킬로그램이 빠졌고, 가벼워지니
춤도 더 잘되더군요. 만일 한국이나 일본에
있었다면 남들 시선 때문에 못 했을 텐데,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뉴욕에서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다시 무대로 돌아갔죠.”
첫 딸을 낳은 뒤 최초의 ‘워킹맘 발레리나’로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특채됐지만, 금세 둘째를 낳고 지도자로 전향했다. 무용수보다
지도자가 체질이었는지도 모른다. “둘째 낳고
고민이 많았지만 임성남 단장님의 끈질긴
설득에 발레단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나를 이렇게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에너지가 되더군요. 그래서 내가 받은 믿음과
사랑만큼 후배들을 키웠죠. 사람이 울타리가
있어야 넘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후배들도
이제 그걸 느끼는지 먼저 찾아와서 밥도
사더군요.(웃음)”
1996년 37세 나이에 본인은 꿈도 꾸지 않던
국립발레단장에 임명됐을 땐 당황했다.
안숙선·국수호 같은 전통예술 대가들과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을 해야 했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을 올리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던 것도 사실이다.
“단장으로서의 준비는 안 된 상태였지만
지도위원을 하면서 발레단에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것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어요. 무용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줘야 스타를 배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말을 했죠. 그래서 으쌰으쌰 만든 게
‘해설이 있는 발레’예요. 관객을 위해서 준비한 게
아니라 젊은 단원들을 위한 무대였는데, 그것이
대중화로 이어졌죠. 단장으로 계약한 만큼
나는 무대를 딱 끊었어요. 요청도 있었지만 절대 돌아보지 않았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지속된 단장 1기
시절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국립발레단은
재단법인으로 독립해 재정을 확보하고,
볼쇼이발레의 클래식 발레와 장 크리스토프
마요Jean-Christophe Maillot의 컨템퍼러리 발레를
들여와 발레단을 업그레이드했다. 하지만 비좁은
무용계에서 그의 독주를 마냥 곱게 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해외 공연을 나간 사이 단장이 바뀌는
황당한 일도 겪었다. “자부심이라면 2000년
재단 법인화죠. 국립극장 산하 단체로 있을 땐
극장장의 예산을 받아써야 했지만, 내가 직접
예산을 따오게 되니 능력만큼 공연에 투자할 수
있었어요. 100억 원까지 확보해 김지영·김주원
같은 능력 있는 무용수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니 좋은 무용수들이 국립발레단에 오게
됐고, 파리에서 최고 안무가를 불러오고,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최고 의상을 입힐 수
있었죠. 그렇게 잘 하고 있었는데 단장 공모제로
바뀌더니 첫 상하이 공연을 나간 사이 제 자리가
없어졌더군요.(웃음) 그래서 2008년 그 공모에
도전한 거죠.”
2013년까지 이어진 두 번째 임기에도 예산을
적극 확보해 해외 네트워킹에 나섰고, 우리 무용수들을 세계 무대 중심에 세웠다. ‘작품은
수입하되 무용수는 수출하는’ 전략이었다.
“나는 좋은 작품을 사왔지 무용수를 수입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볼쇼이·라 스칼라극장에서
합동 공연을 열어 김지영·이동훈을 수출했죠.
볼쇼이극장에서 <스파르타쿠스>를 공연하던
순간은 잊을 수 없어요. 현지 무용수들을 군무로
세우고 김지영·김주원를 센터에 올렸으니까요.
박세은·김기민이 파리오페라발레와
마린스키발레에 갈 수 있었던 것도 19세에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무대에 세웠기
때문이에요. 명문 발레단에서 비디오를 보고
그 어린 나이에 ‘백조’ 주역을 했냐며 오디션
보러 오라고 했다죠. 그런 자부심이 내게 있는데,
이제야 얘기할 수 있네요.(웃음)”
돌아보면 최태지 단장 시절엔 ‘김주원·이원국 vs.
김지영·김용걸’ 식으로 발레계 라이벌 구도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경쟁 속에서 스타 만들기
전략이었다. “현역 때 나는 갈비뼈가 부러져도
무대에 서야 했어요. 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하지만 단장이 되고부터는 되도록 많은
무용수에게 일단 기회를 주자는 철학을 세웠어요.
어떤 작품에도 캐스팅이 세 커플은 있어야 서로
자극받아 더 열심히 하거든요. 신인이라도 잘할
거라고 믿어주고 기회를 주니 긴장 속에서 스스로
성장했고, 그래서 많은 스타 무용수를 키울 수
있었죠. 믿어주고, 시켜주면 되더라고요.”
국립발레단에서의 12년을 뒤로 하고 2017년부터
광주시립발레단을 4년여 이끌면서 지역
발레단의 수준도 끌어올렸다. 좋은 공연은 투어가
오기만 기다려야 했던 지방 도시에서 수준급
발레 공연을 자급자족하게 된 것이다. “사실
발레단 운영은 그만하고 싶었는데 단원들이 직접
초청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시 하나밖에 없던
시립 발레단이니 여기가 잘 돼야 다른 지역에도
발레단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제로’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산을 3배로 늘리고도
늘 허덕였지만, 내가 있는 곳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광주 시민들은 좋은
공연이라면 서울까지 가서라도 보는 분들이라
제가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공연은 대부분 티켓 오픈하자마자 매진됐죠.”
지금은 서울특별시 문화 명예시장과 서울문화예술포럼 공동 회장을 맡아 발레의 경계 바깥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서울문화재단은 서울문화예술포럼을 더욱 확장할 계획이란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기획자, 행정가, 일반 시민, 학생까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하는 자리예요. 예술가들은 자기 일과 자기 생각에만 빠지기 쉬운데, 주변도 둘러보면서 범위를 넓히게 하려는 거죠. 이런 만남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협업 기회도 만들면서 서로 끈끈해지는 것 같아요.”
그는 지난 2월 창단한 서울시발레단에도 기대를 전했다. 무용인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다. “좋은 무용수들은 다 외국에 나가는데,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 국내에 단체가 적어서예요. 나가서 많이 배워서 빨리 돌아오면 좋은데, 자리가 없는 실정이죠. 일자리가 없어서 대학에 무용과가 없어지는 시대에 좋은 소식인 만큼, 규모 있게 운영해줬으면 합니다. 발레단 하나 생기면 무용수뿐 아니라 분장사부터 마사지사까지 많은 스태프가 필요할 테니까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창작발레 개발과 안무가 육성이 한국 발레의 급선무였다면, 지금은 한국 무용수가 창작발레로 무용계 최고 권위의 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는 시대다. 지금 우리 발레의 화두는 뭘까.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발레나 오페라의 수준이 그 나라 문화 수준을 말해주잖아요. 지금이 우리나라의 문화 황금기라 하고, 겉보기엔 400년 역사의 프랑스 발레나 우리나 비슷해 보일 겁니다. 돈만 있으면 화려하게 만들 순 있지만, 역사를 정리하고 아이덴티티를 정립하지 않으면 그것이 문화 자산으로 남을 수 없어요. 임성남 국립발레단 초대 단장님이 나를 무용수로, 김혜식 2대 단장님은 나를 지도자로 만들어줬는데, 그분들이 없었다면 나도 없고 우리 발레의 세계화도 없었겠죠. 늘 아쉬운 게 우리는 문화를 역사로 남기는 데 인색해요. 러시아나 이탈리아에 가면 사람들이 예술가의 묘지에 가잖아요.
그 나라 사람들에겐 문화 강국의 자부심이 느껴지죠. 우리가 지금 루이 비통을 들고 다녀도 문화 지식이 없다면 계속 부자로 살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 50년 미래를 보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 대통령실까지 모두가 함께 방향성을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글 유주현 중앙SUNDAY 기자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