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햇볕의 통로, 잠실동 송파구 올림픽로
그동안 장애예술 분야의 시각예술 레지던시로 독보적인 위상을 구축해 온 잠실창작스튜디오가 잠실종합운동장의 리모델링으로 인해 잠실에서 운영을 마치고 오는 9월 대학로(종로구 대학로12길 31)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운 장소로 떠나기 전, 잠실창작스튜디오와 잠실종합운동장을 기록해본다.
잠실종합운동장과 실내체육관 사이 거대한 덱deck이 마치 나르는 양탄자처럼 공중에 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에 잠실창작스튜디오가 있다. 아마도 커다란 간판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평범한 외관이지만 이곳 외벽 두 곳에는 쇼윈도처럼 작은 갤러리가 있어 지나가다 슬쩍 그림 구경을 할 수 있다. 잠실창작스튜디오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창작공간 중 한 곳으로 2007년에 개관했다. 국내 최초, 시각예술 분야 장애예술인 창작스튜디오다. 매년 정기공모를 통해 뽑은 12명의 입주작가에게 12개의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를 지원한다. 잠실창작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휠체어 높이에 맞춰 제작된 낮은 싱크대가 있는 작은 카페형 휴식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입주작가들의 작업실이 있고 왼쪽에는 사무실, 정면으로 다목적 공간인 ‘하늘연’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보인다. 하늘연은 워크숍·세미나 등이 가능하며 대관도 할 수 있다. 작지만 입주작가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장애·비장애인 동행 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를 통해 장애와 관계없이 다양한 예술가와 시민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함께할 수 있는 작업을 다채롭게 시도하고 있다.
‘쎄울’로 불리던 잠실의 이야기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3월 초, 잠실동에 왔다. 으슬으슬 떨릴 만큼 춥지는 않고 그렇다고 외투를 벗기에는 애매한 날씨였다. 나는 그동안 탄천도 걷고, 롯데월드에서 바이킹도 탔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경기장을 자세히 살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실은 1960년대까지 한강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거대한 섬이었다. 조선 초 뽕나무밭이 있어 누에치기가 성행한 잠실섬이 홍수가 날 때마다 몇 번씩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지금은 거대한 경기장과 아파트 단지로 꽉 찬 ‘육지’로 바뀌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제 예전 잠실섬과 한강의 흔적은 ‘잠실’이라는 이름과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가 또 다른 섬처럼 떠 있는 석촌호수에 겨우 남아 있다.
1981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제치고 대한민국의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1970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를 돈이 없어서 개최권을 반납하고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나라에서 10년 만에 올림픽을 유치했다. “쎄울!”이라고 외치던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목소리는 당시 국민학생이던 나에게 조금 우습게도 들려 또렷이 기억한다. 1981년은 서양 사람들이 서울을 ‘쎄울’ 이라는 이상한 발음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해였다. 세계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를 때였고, 나도 바덴바덴이 어디에 붙어 있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건설된 올림픽주경기장은 1976년에 착공해 1984년에 준공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그곳은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국가 역량이 집중된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이 희생돼야 했다. 그래서일까. 올림픽이 끝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 경기장에는 운동 경기보다 콘서트와 페스티벌이 더 많이 열린다. 내가 찾아간 날에도 2년 반 만에 열리는 BTS의 콘서트 준비가 한창이었다.
평일 낮의 잠실종합운동장은 무척 여유로웠다. 아니 좀 심심했다. 외부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주차장에 차는 많은데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덕분에 시야가 막힘 없이 넓은 공간을 혼자 전세 낸 느낌이다. 물론 며칠 후면 BTS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이 공간도 오랜만에 북적댈 것이다. 2년간의 코로나로 인해 경기도 공연도 거의 열리지 않아서 잠실종합운동장은 개점 휴업 상태이긴 했지만, 아파트로 빽빽한 잠실의 한강변에서 이곳은 축복과도 같다. 한강 주변의 많은 땅이 점점 사유화되는 세상에서 이곳만은 아직 모두의 땅으로 남아 바람과 햇볕의 통로가 되고 있다.
올림픽주경기장이 준공된 지 30년을 훌쩍 넘어 40년을 바라보고있다. 30년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정도의 시간이다. 경기장을 건설하고 올림픽을 개최한 세대는 이미 은퇴 이후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올림픽 세대가 저무는 시점에 올림픽주경기장이 다음 세대를 위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2018년 잠실종합운동장 리모델링을 위한 국제 설계공모가 열렸고, 2022년 하반기부터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늦겨울과 초봄의 경계에 있는 날씨처럼 잠실종합운동장도 1988년으로 상징되는 20세기 경기장과 ‘도심형 스포츠·문화 복합단지’로 변모할 21세기 경기장의 경계에 서 있다. 새롭게 단장한 경기장에서 또 한 번의 올림픽이 열리는 상상을 해본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한강의 시간이 퇴적된 이 장소에서 그들만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하는 순간을 이번에는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다.
글·그림 정연석_《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