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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엘리펀트스페이스‘22세기 문화공간’ 지향하는 가변적 실험공간
아카이브 전문그룹 레벨나인이 2017년 4월 서교동에 개관한 엘리펀트스페이스는 ‘22세기 문화공간’을 표방한다. 이곳은 ‘100년 후의 박물관과 공연장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상상을 현실로 구현했다. 디지털 아카이브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여러 장르의 예술가와 연구자가 함께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펼치는 곳, 엘리펀트스페이스를 찾았다.
관련이미지

1 <죄의 정원> 전시실 전경. (사진 김상태)

2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 <들숨날숨>.

3 김순남 탄생 100주년 기념 <전복된 시간을 위한 협주>.

4 <에드워드 호퍼: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 작품 도슨트와 재즈 공연.

다채로운 장르 융합이 일어나는 큐리어스 큐브

개관 1주년 기념전으로 지난 6월 열린 <죄의 정원>은 이 공간의 지향점을 한눈에 보여준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테마로 삼았지만, 해석은 디지털 세대의 눈높이에 맞췄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제공받은 디지털 자료를 토대로 원화를 재해석한 ‘프로젝트-레벨나인’의 아트 다큐멘터리, 보쉬의 그림 속 기이한 식물들을 재해석한 식물상점의 설치작품, 보쉬의 정원을 소리로 재구성한 밴드 이상의날개 리더 문정민의 사운드 설치 등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여느 전시에선 접하기 힘든 범죄심리학자 표창원과 철학자 심세광의 강연,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클로징 공연 등 독특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화제를 모았다.
엘리펀트스페이스는 공간을 기획하고 채우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전시장, 공연장, 혹은 강연장이 되기도 한다. 같은 주제가 참여자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는 모습은 ‘장님과 코끼리’의 우화에서 여섯 장님이 각자 만진 부위에 대한 기억만으로 코끼리를 설명하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엘리펀트스페이스의 김정욱 디렉터는 이 우화를 염두에 두고 공간의 이름을 지었다. 그는 “코끼리를 진실의 메타포로 해석하기도 한다. 뭔가 알 수 없지만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한 가지 사건을 각자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곳이길 바라며 지은 이름이다”라고 작명 취지를 밝혔다. 작지만 겹겹이 의미를 담은 공간, 엘리펀트스페이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다큐멘터리 영상작가였던 김정욱 디렉터는 2014년 서울의 한 마을박물관 프로젝트 기획자로 일하던 김선혁 디렉터에게 협업 제안을 받아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활동 분야는 달랐지만, 언젠가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일 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뜻은 같았다. 두 사람은 2016년 여름부터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제공한 고화질 디지털 자료를 모아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레벨나인에서 박물관·미술관 아카이브와 전시 웹사이트를 구축했던 경험이 새사업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해외에 있는 스칼라 아카이브와는 정식 라이선스 계약도 맺었다.
짬짬이 둥지 틀 곳을 물색하던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제빙기 창고였던 서교동의 빈 건물이었다. 실면적은 좁지만 층고가 높아 관람자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기에 좋았다. 공간의 협소함은 한쪽 벽 전체를 거울로 채워 넓어 보이는 착시효과를 주는 것으로 어느 정도 보완했다. 두 디렉터는 엘리펀트스페이스의 심장과 같은 이 공간을 큐리어스 큐브(Curious Cube)로 명명했다.

디지털 자료를 요리하는 실험공간

예술작품을 그저 원본과 사본으로만 구분한다면, 원본을 복제한 디지털 리소스는 단순히 ‘가짜’로 폄하될 뿐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조악한 복제 이미지나, 책에 조그맣게 인쇄된 그림을 떠올린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스페이스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 등 소장처에서 직접 구한 고화질의 디지털 자료를 확보하고, 아카이브로 구축해 분류함으로써 가치를 부여한다. 이 자료들은 원본이 지닌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내포한 재료로 다시 태어난다. 같은 재료라도 누구의 손에 들어가 어떻게 요리되는가에 따라 예술의 맛은 달라진다. 엘리펀트스페이스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들은 전시뿐 아니라 공연을 통해서도 이 실험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4K 멀티 프로젝션으로 투사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재즈 공연이 어우러진 융합형 공연 <에드워드 호퍼: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낮 공연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좌석이 매진을 기록했다.
앞으로도 엘리펀트스페이스에서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 창작과 연구, 전시, 공연을 꾸준히 추진할 예정이다. 디지털 세대의 젊은 창작자들에게는 디지털 자료만큼 요리하기 좋은 재료도 없기 때문이다. 김선혁 디렉터는 “버추얼 뮤지엄과 원본이 있는 뮤지엄의 중간 지점에서 어떤 길을 찾고 있다”고 지향점을 밝혔다. 발품 팔고 비용 들여 모은 정보들도, 국내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공유할 생각이다. 현재는 기획과 공연, 전시에 치중하고 있지만 여력이 생기면 연구 활동도 함께하고 싶다.
“복합문화공간이나 대안공간보다는 실험공간으로 불러주길 원한다”는 엘리펀트스페이스의 다음 전시는 7월 20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리는 <유목증후군: 어둠이 낮보다 먼저 오듯>이다.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의 동명앨범 <Nomad Syndrome>(2017)에서 출발한 이번 전시는 ‘유목’과 ‘증후군’에 초점을 맞춘 음악, 사진, 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을 선보인다. 홈페이지(www.elespace.io)에서 공연 및 강연 예약도 가능하다

글 고경원 자유기고가
사진 제공 엘리펀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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