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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백남준의 <다다익선> 사후 처리 논의비디오아트의 운명, 따를 것이냐 거스를 것이냐
미술관이 고이 소장해온 작품의 수명이 다했다. 예의를 갖춰 마지막 길에 잘 보내주는 것이 좋을까, 계속 수리해서 수명을 늘리며 연명하도록 하는 게 좋을까. 전자 영상장치로 이미지를 내쏘는 비디오아트 작품이라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딜레마다. 그것도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1932~2006)이 남긴 대표작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요사이 이런 딜레마 앞에서 고민에 빠져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백남준이 김원 건축가와 협업해 과천관의 나선형 로비에 설치한 대형 영상탑 <다다익선>이 최근 꺼졌다. 모니터 브라운관과 기계장치의 내구연한이 다해 더 이상 가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지금은 모니터 영상을 모두 끈 채 ‘상영을 중단한다’는 알림문을 작품 앞에 붙여놓았다.

관련사진1, 2
1,003개의 크고 작은 모니터들이 모여 6층 탑을 이루는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

<다다익선>에 내려진 사망선고

지난 2~3월 <다다익선>에 대한 한국전기안전공사의 정기점검 결과는 작품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계속 가동할 경우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누전 상태’란 판정이었다. 점검이 시작된 지난 2월 13일부터 작품 가동은 전면 중단된 터라, 미술관 쪽은 더 이상 작품에 전원을 넣지 않기로 하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가동 중단은 익히 예상됐던 사태이기도 했다. 모니터는 물론 배선, 변압기 등의 관련 부품들이 수년 전에 이미 10년의 내구연한을 넘겼는데도, 매일 6시간 이상 전원을 넣고 영상을 켰기 때문이다. 심한 과부하가 걸려 자칫 화재 등의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조마조마한 상황이었고, 이를 감지한 미술관 측은 지난해부터 아예 전담직원을 두고 작품의 이상 여부를 지켜봐왔다.
높이 18m를 넘는 <다다익선>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미디어아트 조형물이다. 거장 백남준의 영상예술을 집약한 대표작이자, 국립현대미술관의 얼굴로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국민예술품이다. 10월 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1,003개의 크고 작은 모니터들이 모여 6층 탑을 이룬다. 모니터는 모두 다섯 종류다. 6인치 60대, 10인치 552대, 14인치 93대, 20인치 103대, 25인치 195대에 달하는데, 미술관 측은 응급 수리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모니터 브라운관 등의 주요 부품들이 단종돼 교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앞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대로, <다다익선>은 지난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수리를 받아왔다. 특히 2003년에는 삼성전자 등의 협조로 낡은 모니터 1,003개를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는 대수술을 했다. 그 뒤로도 지난해까지 7차례 이상 내부 기계장치와 영상 등에 대한 부분 수리작업을 하면서 연명해왔지만, 이제 더 이상 수리로는 수명을 연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철거와 교체, 두 가지 대안

이 거대 작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건상 당장 딱 부러진 대안이 나오기는 쉽지 않으나,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대안은 대략 두 가지로 모인다. 제대로 장사를 치르고 기념하는 것이 첫째 안이다. 철거하고 <다다익선>을 추억하는 오마주 작품을 설치하자는 의견이다. 두 번째는 영상탑 모니터의 브라운관 대신 첨단 LCD를 갈아 끼우는 안이다. LCD 교체는 백남준 작가의 전속 테크니션(기술 전문가)이었고 작품 수리 전권을 받은 이정성 씨와 정준모전 학예실장 등이 유일한 대안으로 주장해왔는데, 고인의 증언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정성 씨는 “생전 백 선생이 영상 이미지만 온전하게 내보낼 수 있다면 지금 개발된 기술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수시로 말씀하셨다”고 했다. 정준모 전 학예실장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는 “2003년 미술관이 <다다익선>의 브라운관을 교체할 당시 백 선생에게 대안을 물었더니 ‘요즘 쓰는 납작한 걸로 붙이면 되지, 앞으로 다 그렇게 바뀔 텐데 그렇게 바꾸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평단과 국립현대미술관 내부의 일부 학예사들은 LCD 화면으로 교체한다면 작품의 원래 외형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투사되는 화면의 질감도 달라져 고유의 정체성이 변질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생전 백남준도 작품의 운명에 얽힌 논란의 소지를 생각했던 듯하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다익선>을 설치할 당시 10년만 전시하기로 미술관과 약정한 것도 그런 사정 탓일 것이다. 백남준이 요셉 보이스, 조지 마키우나스와 주도했던 1960~70년대 전 세계적인 전위예술운동 ‘플럭서스’는 장르를 넘어선 사회적 예술을 추구하며 기존 작품의 기념비성, 형식성을 경멸했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굳이 <다다익선>의 존립에 연연하기보다 작품의 영상콘텐츠를 보전하되 다른 방식의 기념 전시를 여는 것이 낫다는 대안이 설득력 있다.
백남준의 영상작품을 소장한 외국의 미술관이나 미디어아트 관련 기관들은 작품이 고장 나거나 수명이 다했을 때의 처리 방법에 대한 공통된 매뉴얼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독일의 경우 철저한 원본성을 고집하며, 미국과 일본은 상황에 따라 최근 개발된 기계나 영상을 붙여 수리할 수 있다는 식의 유연성을 보이는 편이다. 기관과는 별개로 소장가들 또한 각기 다른 방침이 있을 것이기에 문제를 풀기가 더욱 난감하다. <다다익선>은 30년간 미술관 현관에서 관객들을 맞으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물로 굳어진 상황이라 철거론은 대중적 반발을 부를 소지도 있다.
미술관 측은 <다다익선>의 장래와 관련해 백남준 작품을 소장, 관리해온 세계 각지의 기관과 유족, 소장가들의 의견을 듣기로 하고 최근 자문 리스트 작업을 거의 마쳤다. 작품 저작권을 가진 미국 스미소니언 미술관과 고인의 대리인인 조카 켄 백 하쿠다 등의 유족, 전속화랑인 가고시안, 기술자 이정성 씨, 정준모 전 학예실장 등이 포함된 방대한 자문단을 꾸려 심포지엄 등을 통한 장기 논의를 거듭하면서 신중하게 결론을 낼 방침이라고 한다. 백남준의 역대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상징성도 높다는 점에서 <다다익선> 존속 논란은 미디어아트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논의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볼 일이다

글 노형석 한겨레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사진 제공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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