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가 쓰기로 한 이야기들
국내 장애예술인 활동 사례
‘장애’에 대한 인식의 각도를 넓혀준 사례가 있다. 바로 ENA의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다. 이 드라마는 자폐성 장애를 지닌 천재 변호사 우영우가 대한민국 대형 로펌의 신입으로 들어가 법정 안팎에서 다양한 난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그리며 많은 시청자에게 쾌감과 감동을 선사했다. 물론 드라마의 이상적 상황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 장애 이면의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은혜 <니얼굴 은혜씨>, 2019
정은혜 작가
화폭 위에 드러나는 내면의 풍경: 시각예술 분야
‘미술계의 우영우’를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자리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가 지난 9월 19일까지 청와대 춘추관에서 20일 동안 개최됐다.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를 체감하는 첫 번째 행사로 마련된 이번 특별전은 사회 각계 유명 인사를 포함해 약 7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은 전시 작품의 개성에 감탄했고, ‘장애예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특별전에는 공모를 통해 총 50명의 장애예술인이 전시 작가로 참여하고 그들의 작품 60점이 소개됐는데,
그중에는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에 배우로 출연한 정은혜 작가도 있다.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인 정 작가는 만화 작가인 어머니의 도움으로 2013년부터 그림을 그렸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정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화폭에도 옮겨져 독창적 캐리커처로 완성됐고,
이후 정 작가는 무려 4천 명을 웃도는 사람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게 됐다.
그는 최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모습을 담은 첫 번째 그림 에세이 《은혜씨의 포옹》을 출간했다.
이번 장애예술인 특별전을 통해 주목받은 또 다른 작가로는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에 걸어둔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김현우 작가가 있다.
발달장애로 소통이 어려운 김 작가는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화소)에 담아 추상적 형태로 재구성한다.
수학 공식, 음표,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름 등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남겨놓은 기록이 현재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11월 대학로에 재개관하는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는 과거 ‘잠실창작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시각예술 분야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지원해 왔다.
앞서 소개한 정은혜, 김현우 작가와 더불어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출신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이로 전동민 작가를 꼽을 수 있다.
청각장애로 말미암아 발달하게 된 시감각으로 일곱 살 때부터 다양한 색감의 그림을 구현해 온 전 작가는
최근 서울의 빛과 야경을 주제로 따뜻하고 서정적인 삶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전 작가는 신한갤러리 기획전을 비롯한 14회의 개인전, 영은미술관 프로젝트전을 포함한 230회의 그룹전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현우 〈가이아 수학〉, 2019
정용준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김원영 변호사와 김초엽 작가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
나이기에 말할 수 있는 서사: 문학 분야
문학 분야에서도 장애예술인이 활약하고 있다.
그중 어린이·청소년 도서 부문 고정욱 작가의 위상은 두드러진다. 2022년 기준 무려 340여 권의 책을 썼고, 300회 이상의 강연을 다녔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으며 1급 지체장애인으로 살아온 고 작가는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된 것을
계기로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가방 들어주는 아이》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등 장애아동을 소재로 한
동화를 많이 발표해 문단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 작가의 목표 중 하나는 장애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다작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장애인이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정용준 작가는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심리적 장애를 겪는 과정을 담은 자전적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발표했다.
말을 더듬는 인물은 그간 정용준 작가의 다른 소설에도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내면의 풍경을 정면으로 들려줌으로써 어린 시절 언어적 결핍에서 비롯된 고통과 고투의 경험을 한층 핍진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한 정 작가는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황순원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등 굴지의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한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방금 떠나온 세계》와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등으로 국내 SF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김초엽 작가는
열여섯 살에 신경성 난청 진단을 받고 보청기를 착용하며 경험한 장애의 서사를 바탕으로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김원영 변호사와 함께 《사이보그가 되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두 사람은 과학기술과 결합한 장애인의 몸을 ‘사이보그’라는 상징으로 접근해 인간의 몸과 과학기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장애와 과학기술을 논할 때 그 중심은 장애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김예리 브레이크 댄서 (사진 출처 김예리 인스타그램)
김원영 변호사는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새로운 몸’으로 구현하는 자유: 공연예술 분야
김원영 변호사는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이다. 그는 법조계에서 장애인의
인권 신장을 위한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동시에 작가로서 《희망 대신 욕망》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등의 책을 통해 장애를 가진 자신의 삶을 토대로 자유와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김원영 변호사는 배우이자 무용수로서 연극 〈무용수-되기〉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인정투쟁; 예술가 편〉 등에 출연하며 장애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 환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몸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했던 성장기의 시간을 지나 연극이나 무용과 같은 공연예술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나의 몸을 자아에 통합하고 있으며 장애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참여사회》 2021년 3월호 인터뷰”는
김원영 변호사의 말처럼 장애예술인에게 몸을 탐구하고 움직이는 공연예술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김용우 무용가는 대한민국 최초 휠체어 댄스스포츠 선수로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 동안 휠체어 댄스스포츠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4년 연속 아시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스포츠와 철학을 좋아하는 건장한 스물여섯 살 청년이던 그에게 사고를 통해 찾아온 장애는 비극적으로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는 휠체어라는 ‘새로운 몸’을 통해 ‘자유’를 재발견하고 이를 ‘휠체어무용’으로 표현하게 됐다.
2024년 파리에서 열리는 하계 올림픽에 브레이크 댄스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며 화제가 되는 가운데
201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올림픽 브레이킹 부문 동메달, 세계 최대 규모의 브레이킹 국제 대회
‘레드불 비씨 원Red Bull BC One’ 2019년 한국 대회 우승, 2020년 ‘레드불 E-배틀’ 월드파이널 4강 진출 등
화려한 성과로 주목받는 국가대표 비걸B-girl이 있다. 바로 김예리 브레이크 댄서다.
후천적 청각장애 판정을 받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보청기를 사용한 그는 불편하기는 해도 청각장애가 꿈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대신 습득력과 박자감이 좋아 춤추기에 유리했다고.
또한 그는 장애가 도리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열심히 연습하는 기폭제가 됐다고 말한다.
저신장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신강수 배우는 10년 이상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며 연기는 물론 음향, 극작, 연출 등 연극계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장애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평생을 살아온 그는 자신의 경험을 연극, 강연, 책을 통해 전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 독립출판으로 펴낸 《132cm 사용설명서》는 신강수 배우와 저신장장애에 대한 궁금증, 그의 가족·사랑·친구·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강수 배우는 홀로 1인 극단을 만들어 활발히 연극 활동을 해온 경험을 인정받아 2018년 대한민국 장애인예술경진대회 연극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세상에 울려 퍼지는 기적의 소리: 음악 분야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은 ‘음악’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21대 국회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당선된 김예지 의원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시각장애를 가진 피아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숙명여자대학교 음대에서 수학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피바디 음악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는 각종 콩쿠르를 석권하며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음악을 들려줬다.
장애예술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최근 ‘장애예술인 지원 3법’을 발의해 통과시킨 데 힘쓴 그가 세상의 편견에 맞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바퀴 달린 성악가’로 유명한 이남현 교수는 군 제대 후 사고로 어깨 아래 모든 신경이 마비된 중증장애인이다.
폐활량이 사고 전 30%밖에 되지 않아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좋아하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고,
긴 시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중증장애인 최초의 성악가로 거듭나게 됐다.
그는 예술 경험이 장애인의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경희대학교 공연예술학과 박사과정 논문으로
〈장애인의 문화예술 활동이 지각된 가치와 삶의 긍정적 가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산문집 《나는 지금이 좋다》를 통해 몸에는 장애가 있어도 꿈에는 장애가 없음을 이야기했다.
앞서 소개한 이들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애예술인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꿈과 도전의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
장애로 인해 도리어 신체의 다른 감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장애로 인해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이 더 좋다는 이야기는 장애예술이 하나의 장르로 독립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로 보인다.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온전히 통합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부디 잊힌 꿈을 돌아보는 가을이 되기를 바란다.
글 장보영_객원기자 | 사진 제공 이야기장수, 월간미술, 서울문화재단
정은혜, 김현우, 전동민, 고정욱, 정용준, 김초엽
김원영, 김용우, 김예리, 신강수, 김예지, 이남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