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를 느끼고 사유하는 일
화가 박승예
화가 박승예는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공책에 낙서하듯 작은 동그라미를 끊임없이 그리다 보면
어느새 괴기스러운 괴물이 캔버스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괴물은 거의 화가 자신의 얼굴을 거울 삼아 본뜬 모습이다.
2008년 첫 개인전 <자화상: 괴물>을 개최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끊임없이 괴물을 그릴 거라고 말한다.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타인을 괴물로 여기지 않기 위해서
괴물의 모습을 직시해 공포와 불안을 마주하고 이해한다.
박승예는 스스로 괴상한 표정을 지어 촬영하고는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Q 어릴 때 친구에게 학교 화장실 괴담을 듣고는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공포에 굉장히 민감한 분이시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공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립니다. 굉장히 두려울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공포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나요?
저는 정확히 기억해요. 1996년 11월부터였어요. 왜 기억하느냐면 당시 미국에서 살았는데 핼러윈데이였어요. TV에서 24시간 공포영화를 틀어주잖아요. 그런데 제가 무서워서 공포 영화를 못 봤어요. 겁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했거든요. 마땅히 선택할 채널이 없으니까 일단 봤는데, 안 무서운 거예요. 그때 학교를 일주일 동안 안 가고 <13일의 금요일> <나이트메어> <프라이데이 나잇> 시리즈를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봤어요. 그 때든 생각이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구나. 겁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두렵다는 생각에 피해 왔기 때문에 마주하지 못한 거죠. 사실 잘 모르니까 공포에 휩싸이고 회피하잖아요. 공포가 ‘모른 다’에서 시작하는 거죠. 그즈음부터 ‘직면과 직시’가 작업 맥락으로 형성됐어요. 누구나 두려운 무언가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잖아요.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타협일 텐데. 마주 보며 그것을 이겨내고 제가 괴물을 그리게 된 거죠.
Q 어떤 괴물인가요?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 같다는 시적 표현이에요. 저는 우리 모습을 생각했는데 보는 분들이 괴물이라 표현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면면은 ‘나’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괴물로 비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싶었죠. 그래서 괴물에 대해 다시 생각했어요. 단지 얼굴이 찌그러져서 괴물이 아니고, 사회 다양한 사람의 모습에서 보이는 오만이나 폭력·거짓·위선이 괴물로 느껴졌어요. 저도 물론 타인에게 그런 괴물일 수 있고요. 괴물 같은 사람을 볼 때마다 사실은 피하고 싶고, 어울리고 싶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마주해서 방법을 찾아야만 해요. 제가 그려내는 괴물은 그러한 사회와 인간의 면면, 제 모습 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괴물을 마주 보며 희망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enforced insight>
종이에 아크릴, 펜 | 150×130cm | 2011
Q 구체적으로 어떤 점 때문에 공포를 느끼나요?
2011년에 <괴물전: 산해경> 전시를 열었어요. 산해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입니다. 책에서 기린을 설명하는데요. 기린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이 기린을 묘사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목이 어떻게 길고, 뿔이 저렇다 하며 그리겠지만 엉뚱한 기린이 나오잖아요. 상상으로 괴물 같은 기린을 만든 거죠. 이때 사람들의 상상이 공포의 실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포의 대상은 귀신·괴물도 있고 전쟁·질병·죽음도 있잖아요. 모두 두렵죠. 그리고 지금 당장 눈앞에 존재하지 않아요. 스스로 상상하며 미연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거죠. 문제가 없는데 비행기가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거랄까요. 사람도 그렇고요. 앞에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요. 때로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더 섬세하게 공포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도 해요. 머릿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어떤 형체를 만들어 공포의 대상은 점점 커지고 무시무시해지지 않을까요.
Q 그렇다면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실제 감정을 느끼는 거네요.
귀신은 존재할지도 모르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공포는 분명 있어요. 공포를 느껴 심장마비가 올 수도, 너무 무서워서 자기 보호를 위해 칼을 휘두르다가 옆 사람을 찌를 수도, 도망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어요. 공포가 나름의 형태를 갖는 방식이죠. 공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은 분명 눈앞에 있잖아요. “공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소용도 없는 말은 중요 하지 않아요. 우리는 공포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데, 그때 어떻게 반응할 것이고 어떤 경계를 하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그 차이 같아요.
Q 10년 넘게 두려운 공포를 마주하는 일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제가 사람들에게 종종 오해를 받는데요. 악몽·공포·두려움·괴물에 대한 작업을 하니까 제 세상은 새까만 줄로만 알더라고요. “쟤는 머릿속에서 괴물만 생각하네”라고 여기는 거죠. 공포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쳐도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대요. 보통은 피가 나고 아프면 주의하잖아요.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무언가를 피하고, 타협도 하고, 계산도 하면서 살고요. 공포가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이 존재하기도 힘들겠죠. 동물도 본 능적으로 공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공포가 비단 여름에만 있지 않아요. 협소한 시야로 공포를 귀신과 괴물로만 생각할 수는 없어요. 모든 삶 속에서 공포의 맥락이 발견돼요. 우린 공포 안에 사는구나. 그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마주하고 이해해야죠.
글 장영수 객원 기자 | 사진 제공 박승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