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행동과 태도로 자기 삶을 증명하다
MZ세대를 사로잡은 세 할머니
세대 차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70년 인생을 산 경험 많은 선배가 훈계와 권위 없이 2030 세대와 격의 없는 소통을 즐긴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라며 당당하게 행동하고, “그러니까 너희들 맘대로 사세요” 라며 젊은 세대에게 위로를 건넨다. 세대를 가로막은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나다운’ 삶을 사는 시니어
1년 전 박막례 할머니를 인터뷰로 만난 적이 있다. 우리의 ‘막례쓰’는 손녀 김유라 씨가 만든 유튜브 영상으로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박막례 할머니는 유튜브 팬들을 ‘편들’이라 부르는데, 인터뷰 내내 “모든 게 편들 덕분 아니겠느냐”며 “내가 이 나이에 구글 사장님도 만나고, 미국도 가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답했다. 필자가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책을 낸 후 여러 차례 사인회를 진행한 후였다. 박막례 할머니가 펴낸 책의 독자는 2030 여성이 대다수였는데, 사인회 이야기를 전하던 그녀는 잠깐 울컥하며 말했다. “할머니 만난다고 쩌~어기 멀리서 기차 타고 올라온 편들도 있더라고. 나를 보고 편들이 우는데, 내가 막 안아줬어. 편들 보면 고맙고 짠하고 그래요.”
박막례 할머니의 구독자 ‘편들’은 할머니가 막장드라마를 보며 차진 리뷰를 해주고 끝내주는 간장국수 레시피를 알려줘서 열광하는 것만은 아니다. ‘막례쓰’와 팬 사이에는 끈끈한 위로의 연대가 존재한다. 막례쓰는 인생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다 잘될 거라고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똑똑한 손녀 덕분에 쉽게 인생 역전한 것이 아니라, 매일을 ‘나답게’ 즐겁게 살았기에 유튜브에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유쾌한 할머니에게서 젊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박막례 할머니와 동갑인, 윤여정 배우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미국 아카데미에 한국 배우가 노미네이트된 것도 최초였는데 가뿐히 수상까지 해버린 것이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손주들을 돌봐주기 위해 미국에 온 할머니 순자 역을 맡았고, 그가 아카데미에서 수상하자 한국 언론에서는 ‘K할머니’의 쾌거라고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지적을 빌리자면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은 한국 영화계, K할머니의 쾌거가 아니라 윤여정 개인의 성과다. 1971년 <화녀>로 영화에 데뷔한 윤여정은 55년 동안 연기를 해왔고, 수년 전부터 미국 드라마와 영화 등에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그가 출연한 <미나리> 역시 한국 영화가 아니라 미국 제작사 ‘플랜B’가 제작하고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이 연출한 미국 영화다. 재밌는 것은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수상소식이 들리고 윤여정이 모델로 등장하는 광고가 여럿 보인다는 점이다. 1020 여성 소비자가 타깃인 패션 채널 ‘지그재그’부터 오비맥주, 통신사 KT까지 아카데미 수상 이전에 윤여정을 모델로 선택했다. 이 광고 모두에서 윤여정은 카메라를 직시하며 직설적 화법으로 소비자에게 말을 건넨다. “어머, 내가 모델이라고? 얘, 살까 말까 고민될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여타의 어린 모델이 소비자를 향해 반말로 얘기했다면 논쟁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네 멋대로 해라”는 카피라이팅을 윤여정이 발화하면 달라진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익히 들어온 윤여정의 솔직담백한 날것의 말투를, 어떤 허례허식 없는 그 캐릭터를 대중은 윤여정 고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기 또 다른 할머니의 말투는 박막례나 윤여정보다 한층 부드럽다.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에서 밀라노 할머니로 활약하고 있는 유튜버 장명숙이다. 평생 밀라노와 한국을 오가며 패션업계에 종사한 밀라논나의 외형은 짧은 은발 머리에 품위와 맵시가 묻어난다. 유럽 패션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멋쟁이 할머니가 구독자를 향해 나긋이 말을 건다. “할머니가 옷 많이 사지 않아도 되는 컬러 매치법을 알려줄게요.” 밀라논나의 콘텐츠는 패션부터 인테리어, 연애 상담과 아침 브이로그까지 다양하다. 값비싼 명품 옷을 소개하기보다는 30년 된 고급 스카프와 팬츠를 잘 관리해 입는 삶, 환경을 생각해 고체 비누를 사용하고 건강을 위해 저녁은 채소를 먹고 밤마다 요가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할머니. 집에는 30년 이상 된 식물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데, 오래된 가구와 식물을 정성껏 가꾸는 성실한 일상을 논나 할머니는 구독자에게 보여준다. 밀라논나 유튜브 채널에는 “저도 할머니처럼 나이 들고 싶어요” “할머니 멋져요” 나이 드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할머니를 보고 배운다는 젊은 여성들의 댓글이 빼곡하다
닮고 싶은 누나·언니
70이 넘어 액티비티 스포츠에 도전하는 박막례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을 밟고 수상 소감을 유머러스하게 영어로 말하는 윤여정, 여전히 20대의 몸매와 패션 감각을 유지하며, 나이 들어도 매일 일기를 쓰고 등을 곧게 펴고 자신을 사랑하라 조언하는 밀라논나.
2030이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수명이 길어졌으나 현실은 불투명하고, 세상이 바뀌는 속도는 너무 빨라 은퇴 후에 대한 불안감만 가중되는 요즘 시대에 이 세 명의 강인한 할머니는 나이 들어도 여전히 일하며 즐겁게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나이 든 나의 미래’를 떠올려봤을 때 상상하고 싶은 미래의 청사진이다. 과거엔 먹고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요즘 애들은 의지력이 부족해서 문제라는 따위의 기나긴 훈계가 아닌, 행동과 태도로서 자기 삶을 증명한다.
할매니얼’이라고 하여 밀레니얼 세대가 할머니·할아버지풍의 디저트에 열광하고, 오래된 가구로 인테리어한 레트로풍 카페에 찾아가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까지 생겼다. 쑥 라테·흑임자 아이스크림·인절미 빙수를 젊은이들이 즐겨 먹고, 시골집처럼 인테리어한 ‘뉴트로’ 카페에 입장하는 것이 시골집에 대한 향수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할머니·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거나 부모 세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없기에 이들은 전통 과자의 맛을 새로움으로 소비할 수 있다. 어릴 때 쑥떡이나 흑임자강정을 먹고 자라지 않았기에, 이것들의 맛이 더욱 신선하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시니어 크리에이터에 대한 열광 역시 마찬가지다. 명절마다 손주 호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넣어주는 주름진 할머니의 손이 아닌, 나이 들어도 자기 일을 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가꾸어가는 시니어를 밀레니얼은 사랑한다. 길고 긴 내 인생의 이모작도 저들처럼 당당하고 멋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 김송희 《빅이슈코리아》편집장,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