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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6월호

‘노년은 이래야 한다’ 따위는 없다
삶에 찌들지 않은 감각적 시니어

‘노인은 그저 등산이나 하며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가 지고 있다. 그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는 단연 윤여정이다. 그를 보고 “남은 인생을 더 재밌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는 중장년층이 많다. 윤여정뿐만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나빌레라>의 박인환, 유튜브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박막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어 41만 명을 보유한 안경자·이찬재 부부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액티브 시니어’가 부쩍 늘었다.

영화<산나물처녀>의 배우윤여정

‘누군가의 할머니·할아버지’ 아닌
독보적 캐릭터로 화면을 장악한 시니어 배우들

최근 ‘액티브 시니어’의 대명사가 된 이는 윤여정이다. 1966년 TBC 공채 3기 출신인 그는 올해로 데뷔 55년이 된 베테랑 배우다. 90여 편에 달하는 드라마, 3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자타 공인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올랐지만 누구도 그가 70살이 넘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고는 감히 예측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중장년층 배우는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 누군가의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같은 주변부의 역할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속 ‘박카스 할머니’처럼 파격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자신의 한계를 깨온 윤여정이지만 그 역시도 관객에게 인상을 남길 주연을 맡을 기회가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꼈을 것이다.
윤여정은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 출연하면서 한계를 또 한 번 넘어섰다. 그는 <미나리>에서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미국 아칸소주로 이민 온 딸 모니카(한예리)를 돕기 위해 미국에 온 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고생하는 안쓰러운 딸을 위해 손주를 챙기는 희생적 할머니를 연기했다면 순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 찬사를 받진 못했을 것이다. 윤여정은 평범한 할머니 대신 비전형적 할머니를 만들어냈다. 극 중 순자는 장난기 넘치는 사랑스러움과 속정 깊은 따뜻함을 오간다. 밤중에 오줌을 싼 손자 데이비드(앨런 김)에게 “브로큰 페니스”라며 짓궂게 놀리다가도 심장병을 앓는 손자를 위해 노구를 딱딱한 방바닥에 기꺼이 누이고 침대는 손자에게 내준다. 순자를 연기한 윤여정에게 《뉴욕타임스》는 “영리한 신 스틸러”라 평했고, 다수의 미국 연예 매체는 “비전형적·비전통적 할머니를 창조해 냈다”고 평가했다. 여우조연상 수상은 평범하고 흔한 캐릭터는 거부하고, 전에 본 적 없는 독보적 캐릭터를 구축해 내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윤여정의 활약은 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매력은 카메라 밖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와 영화 <여배우들> <죽여주는 여자> 등에서 호흡을 맞춘 ‘절친’ 이재용 감독은 “윤여정은 사적인 자리에서 더욱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귀띔했을 정도로 그의 인간적 모습은 세대를 아우르는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tvN의 <윤식당> <윤스테이> 등 예능에서 선보인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솔한 입담은 그에게 제2의 전성기를 가져다준 요인중 하나다. “60살이 돼도 인생을 몰라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도 67살이 처음이야.” “인생 계획 없어요. 인생은 계획대로 안 돼요. 그냥 하루하루 나 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어디까지 가겠죠.”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들에 ‘윤여정 어록’이라는 이름이 붙어 젊은 세대에게 공유되고 있다.
배우 중 윤여정의 뒤를 잇는 액티브 시니어는 얼마 전 종영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덕출로 열연한 박인환이다. <나빌레라>가 기존 드라마와 달랐던 건 중장년층 배우가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의 캐릭터를 맡았다는 점이다. 덕출은 어릴 적부터 발레리노를 꿈꿨지만 처자식을 돌보기 위해 꿈을 접어야했던 인물이다. “그 나이에 발레를 배워서 뭐 하게요.” <나빌레라>에서 나이 일흔에 발레를 배우겠다는 덕출에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70살이 된 남편 또는 아버지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발레를 배운다고 나섰을 때 대부분의 가족은 이와 비슷하게 반응할 것이다. 무언가에 새로 도전하는 것 자체가 가족들에게 ‘민폐’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덕출은 우연히 무용원 휴학생 채록이 발레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뒤늦게 발레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채록에게 발레를 배우게 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많은 중장년층은 주변의 만류에도 새로운 도전을 꿋꿋이 이어가는 덕출의 모습에서 희망을 봤다. 자신이 60대라고 밝힌 이는 4월 <나빌레라>를 제작한 스튜디오드래곤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최근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서야 난생처음 피아노와 성악을 배우다 보니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 생각하던 중 <나빌레라>를 봤다. 박인환 배우님에게 동화돼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고 적었다. 덕출은, 그리고 그를 표현해 낸 박인환은 내리막이라고만 생각했던 60대 이후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tvN드라마 <나빌레라>의배우박인환

SNS에 힘입어 ‘인생 2막’ 연 일반인 시니어들도 등장

노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건 연예인뿐만이 아니다. <나빌레라> 속 덕출처럼 은퇴 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많은 이의 사랑을 받게 된 일반인 시니어도 있다. 가장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이는 유튜버 박막례 씨다. 올해 74세로 윤여정과 동갑인 그는 131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스타다. 그가 올리는 콘텐츠는 음식 레시피부터 드라마 리뷰까지 다양하다. 뚜렷한 콘셉트가 없음에도 그가 올리는 동영상은 올린 지 1주일 만에 30~40만 조회수를 가뿐히 넘긴다. 젊은이들이 박막례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윤여정이 인기를 끄는 이유와 비슷하다. 때로는 거칠다 싶을 정도의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한 입담 속에 숨겨진 투박한 속정이다. 툭툭 내뱉는 말투 뒤에는 늦게 퇴근하고 돌아온 손녀가 밥은 챙겨 먹었는지 걱정하며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박막례 할머니를 보면 마치 내 할머니를 보는 것 같다”는 댓글도 많다. 세대를 아우르는 인기에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들도 반응했다. 박막례는 구글의 CEO 순다르 피차이, 유튜브의 CEO 수전 워치스키와도 만나 화제가 됐다.
손자와 손녀를 위해 인스타그램에 직접 그린 그림을 올리다가 인기를 끌게 된 이찬재·안경자 부부도 노년의 취미 생활을 통해 SNS 스타가 된 사례다. 올해로 80세가 된 동갑내기 부부는 원래 SNS라곤 전혀 하지 않던 ‘아날로그 할아버지·할머니’였다. 가족들과 1981년 브라질로 이민을 가 생활하던 중 자녀가 미국, 한국으로 떠나면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아들이 부모님 삶에 취밋거리를 드리고자 “그림을 그려보시라”며 아이패드를 선물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제자들과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갔던 날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던 것이 기억난 터였다. 이찬재 씨는 2015년부터 손자와 손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안경자 씨가 글을 덧붙여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고, 6년 만에 41만 명이 팔로우하는 인스타그램의 스타가 됐다. “널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져 버린다”는 글귀와 함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손녀의 얼굴을 그린 그림에는 1만 개 가까운 ‘좋아요’가 눌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난다”는 댓글이 한국어·영어로 적힌다.

이찬재씨의그림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업계에서도 종횡무진하는 ‘힙스터 시니어’까지 등장했다. ‘남포동 닉 우스터’라는 별명이 붙은 올해 68세의 재단사 여용기 씨는 일흔이 가까운 나이가 무색하게 분홍색 리넨 셔츠에 갈색 면바지, 체크무늬의 트렌치코트에 청바지를 멋스럽게 소화한다. 닉 우스터는 ‘세상에서 옷 제일 잘 입는 아저씨’로 온라인에서 유명한 이탈리아의 패션 디렉터다. 5만여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보유한 여용기 씨 역시 한국에서만큼은 닉 우스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17세의 나이에 부산 남포동의 양복집에서 재단사 일을 시작한 그는 한때 기성복의 등장 때문에 직업을 잃고 일용직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시간이 흘러 맞춤형 양복이 다시 대세로 떠오르면서 나이 마흔에 재단사로서 다시 줄자를 잡게 된 그는 일상 패션부터 자신이 만든 양복까지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됐다.
누군가는 “무슨 새로운 걸 하느냐”고 나무랄 수도 있는 나이. 다른 누군가는 “도전하기엔 잃을 것이 많지 않으냐”고 걱정할 수도 있을 나이. 74세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 80세에 41만 명의 팔로어를 보유한 이찬재·안경자 부부는 ‘노년은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몸소 깨부수고 있다. “인생은 70살부터”라는 말을 실천하는 이들의 열정과 도전 정신에 많은 이가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재단사 여용기

김재희 《동아일보》기자 | 사진 제공 필름다빈, 스튜디오드래곤, 안경자, 에르디토 홀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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