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시대, 예술의 지속성과 본질을 고민하며 진행되는 축제의 의미
<서커스 캬바레>와 <서울거리예술축제 2020>이 9월~10월 초에 걸쳐 열릴 예정이다.
이 불안한 시절, 축제가 준비하는 것은 ‘위로’다.
절망을 풀어내고 희망을 연결하는 일이다.
“무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간단해. 독방에 가둬놓는 거야”
소설 《피터팬 죽이기》에서 작가 김주희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다.
이른바 단절, 혹 그로 인한 외로움이란 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다. 코로나19 팬데믹, 기상 관측 이래 역대 최장의 장마.
이 모두가 처음 투성이의,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생이라 서툴고 부족한 것이 많을진대, 난생처음 겪는 상황, 그 낯섦의 양상은 밝고 설레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두려운 것이며, 그것이 만들어낸 단절은 가뜩이나 외로운 삶을 더더욱 외롭게 만든다.
이미 코로나19로 침잠해 버린 일상은 오래고도 지루한 비, 축축하고 꿉꿉한 날씨로 그 무거움의 질량을 가중한다.
기록적인 폭우는 차치하더라도 온난화, 기상이변, 해충 등 재앙이 연상되는 온갖 단어들이 빼곡히 들어찬 느낌이다.
다행은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이고, 불행은 시간이 흘러가야 한다는 거라는데 아직 흥건하게 고여 있는 불안과 불편의 시간에 감히 축제라는 걸 도모하다니 어불성설이라 꾸짖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코로나 시대, 축제를 계속하는 이유
그럼에도 8월의 허리를 지나가는 지금, 우리는 서커스 페스티벌 <서커스 캬바레> (10. 9~11)와 <서울거리예술축제 2020>(9. 18~10. 4)을 준비하고 있다. <서커스 캬바레>의 경우, 당초 5월에 예정됐던 것을 10월로 미룬 것이며, <서울거리예술축제>는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총 4일간 서울광장, 청계광장 등 도심 주요 광장에서 개최하려던 것을, 9월 18일부터 10월 4일까지 총 17일간 종로, 을지로 등 도심 내 소규모 공간과 골목에서 시기와 장소를 분산해 추진할 계획이다. 사전 예매와 거리 두기 관람, 현장 통제, 전자출입명부 관리, 긴급연락체계 구축 등 방역을 위한 단단하고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최근 적극 활용되고 있는 온라인 생중계도 병행한다. ‘Post 코로나’에 앞서 ‘With 코로나’를 준비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껏 우리가 펼쳐온 축제는 여타 지역 관광 축제처럼 대형 이벤트와 같은 현대적 축제 문법을 빈번히 쓰지 않았다. 예술, 그중에서도 거리예술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을 위한 것 또한 예술이 아니다.” 라고 한 작곡가 쇤베르크의 일성처럼, 적절한 불편을 만드는 ‘예술’과 시민 참여뿐 아니라 도시 브랜드 창출이라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목적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했다. 그런 사유로 예술로서의 가치와 대중적 기호에도 부합하는 것이 공공축제로서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자칫 축제성, 시민 참여를 배제한 채 오직 예술가에 의한, 예술만을 위한 축제를 경계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다양한 언택트 방안을 구현해야 하는 이번 축제는 ‘제한적 시민 참여’라는 난제를 떠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영화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대사처럼 삶을 흔드는 속수무책의 무엇으로부터든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그에 앞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 서보자. 우리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 축제, 혹 예술이란 것을 지속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축제(祝祭, festival)는 개인 또는 집단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 혹은 시간을 기념하는 일종의 의식이며, 때로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산업으로서의 경제 가치와 함께 참여를 통한 시민 놀이문화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탈’과 연결되는 축제란 것은 ‘일상’과 이율배반적 양상을 띠며 집단성과 현장성을 주된 속성으로 하는 까닭에 코로나19와 같은 전염성 질병이 향후 지속된다면 어느덧 일상의 풍경에서 차츰 지워져 버릴지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다양한 대안이 제안돼야 하며, ‘Post 코로나’ 뿐 아니라 ‘With 코로나’의 옷을 입힐 수 있는 새로운 축제의 전형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할 축제는 ‘위로’다. <걱정말아요 그대> <한숨> <오르막길> 등등 사람들의 고되고 퍽퍽한 삶을 위로하는 음악이 자주 소환되고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강제적 단절은 외로움·그리움과 뒤엉켜 문학과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을 토닥였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삶을 대하는 지혜일 수 있듯 그렇게 절망으로 갇히고 닫혔던 마음을 풀어내 잇고, 희망을 직조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며 축제 아닐까. 외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년 여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개최되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은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영국의 문화 부흥을 이끌고 ‘인간 정신을 꽃피우는 기반을 제공’할 목적으로 시작됐으며, 세계 3대 축제의 하나로 불리는 ‘삿포로 눈축제’ 또한, 패전의 아픔에서 삿포로 시민을 위로하고, 춥고 긴 겨울을 즐겁게 보내자는 의도로 1950년 시작됐다. 특히 일본의 3대 마쓰리(축제) 중 하나이며 대표적인 여름축제로 손꼽히는 후쿠오카의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 축제는 과거 한 승려가 당시 이 지역을 휩쓸던 역병을 막기 위한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땀과 눈물을 기억하는 최선의 축제를 위해
또 다른 관점에서 축제의 가치는 ‘생존’이다. 모두가 어려운 시대라고는 하나 고통의 강도는 각기 조금씩 다른 것이 자본주의의 냉혹한 일면이기도 하다. 지금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본업에 몸담기보다 택배기사, 대리운전 등으로 더욱 절실히 그들의 생존을 항변하고 있으며, 축제기획자, 스태프 등 축제 산업 종사자 또한 극한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말하듯 “생존이 곧 승리”인 시대. 이러한 예술과 예술가들의 생존을 위해 축제는 그 자체로 예술 현장을 읽고 압축한 지원일 수 있다. 최근 뮤지컬 프로듀서 8인이 뮤지컬 종사자들을 돕기 위해 <쇼 머스트 고 온>이란 뮤지컬 갈라를 준비했다는 소식이 유독 반가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선(善)’은 올바르고 착함을, ‘최선(最善)’은 ‘가장 좋고 훌륭함’을 이른다. 코로나19의 시대, 축제는 ‘최고(最高)’가 아닌 ‘최선(最善)’이어야 한다. 질병을 ‘치료’할 순 없어도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하며, 비를 멈추게 할 순 없어도 누군가에게 ‘위로’의 우산을 씌워주어야 한다. 축제는 그것을 위해 애써온 예술가들의 발걸음을 기록한 언어이며, 그들의 땀방울을 담아낸 그릇이다. 그것은 예술과 예술이 만나고 헤어지는 길목이며, 예술과 사람이 모여드는 마을인 것이다. 하여 축제의 성패, 혹 가치는 과거를 넘어서는 빛나는 무엇을 우뚝 세우는 것에 있지 않다. 비록 만석의 군중이 열광하지 않았다 하여, 뜨거운 이슈를 터뜨리지 못했다 하여, 축제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최고’였을지 모를 사람과 사람, 그들의 땀과 눈물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 글 백승우_서울문화재단 문화시민본부장
- ※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축제의 일정이 변경, 연기 또는 취소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