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곗바늘을 돌린 을지로 ‘21세기 신 다방문화’ 기행 시곗바늘을
올겨울 서울 여행을 준비하는 30대 일본 직장인이 물었다. “을-지-로에 가보려고 해요. 커피랑 디저트가 유명하다는데, 분위기 좋은 카페 없을까요?” 한일 갈등이 단골 뉴스거리인 이 시국에 바다 건너 서울을, 거기다 외국 관광객들이 서울 여행 순위 1·2로 꼽아온 경복궁이나 남대문시장이 아니라 ‘을지로’를 콕 찍어 말할 줄이야. “역시 힙지로구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로가 ‘힙지로’로 불린 건 최근 2~3년 동안의 일이다. 힙지로는 ‘유행에 밝다’는 ‘hip’이란 영어 단어에 ‘을지로’가 붙은 말이다. 1970 년대 한창 전성기를 누리며 시보리1)와 로구로3)를 하던 공구 거리 및 을지로 일대가 산업구조 변화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시간이 멈춘 공업사와 철공소 자리에는 ‘뉴트로’ 바람이 스며들기 적절했다.
뉴트로 바람을 키운 건 ‘커피’다. 한 시절 분쇄된 쇳가루가 휘날리던 자리를 커피 가루가 채워나갔다. <커피한잔>으로 삼촌·이모들의 가슴을 애태운 펄 시스터즈가 MBC 가수왕이 된 1969년, ‘다방’ 대신 ‘커피전문점’이란 간판이 치고 올라오던 88 올림픽 당시와 1990년대, 그사이 어디쯤에서 사라진 레트로 다방문화와 생활사를 재현한 카페에서 21세기 청년들이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 혹자는 싸늘한 경쟁시대에 위무가 필요한 신 청년문화로 보기도 하지만 을지로를 택한 2030세대 청년들은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꿈’이라 입을 모았다.
“을지로는 제 남편의 고향이기도 하거든요. 을지로 감성을 온전히 지킨 ‘편안한 공간’을 제 손으로 만들길 꿈꿨어요. 온 세대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말이죠.”
골목 속 건물, 널찍한 2층 고깃집 자리에 김용안·강민선 부부의 꿈을 담은 ‘을지빈’이 있다. 을지로의 ‘을’, 빈티지의 ‘빈’에서 한 글자씩 따서 간판을 올렸다. 구식 선풍기, 전화기, 흑백 TV, 영화 포스터 등은 빈티지 물건에 흠뻑 빠져 살던 김 씨의 수집품이다.
이곳은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뉴트로 열풍으로 북적이는 일대에서 좌석이 편안하기로 평이 높다. “을지로 동네문화에 익숙한 남편 덕”이라고 두둔하는 강 씨다. 어릴 때부터 인쇄소 골목을 뛰어놀며 자란 김 씨는 ‘을지병원’에서 태어난 을지로 토박이다. 강 씨의 아버지는 을지로 인쇄소에서 평생을 보내고 지금도 현역에서 경건하게 노동을 한다. 월급 받던 금융권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사적인 추억이 가득한 곳에서 ‘자영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때 고민이 많았지만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경험한 내 집 같은 공간’을 만들겠다는 꿈에 도전했다고 한다.
겨울 신메뉴로 개발한 ‘자몽비앙코’는 자몽청에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조합했다. 고소한 커피콩 너머 올라오는 감귤 향이 매력이다. 아인슈페너 계열의 달달한 커피와 청포도 향을 살린 ‘머스크 밀크티’, 팥과 말차로 만든 모나카가 잘 나간다.
위치 서울시 중구 을지로14길 21
세운상가 3층에 들어선 ‘호랑이’는 2년 차를 맞은 뉴트로 카페다. 당시 서울시 청년지원사업에 발탁돼 이 작은 공간을 낙점한 이세준 대표는 “예술업종에 있었다. 회화, 무용, 음악 등 동종업계에 있는 이들이나 가까운 친구들과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작업실 같은) 빈티지 공간을 구상해 소박하게 문을 열었는데 불현듯 인기가 생겼다”며 놀라워했다.
워낙 한국문화를 좋아해 한국적인 정서가 집약된 동물 ‘호랑이’를 택해 가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카페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호랑이 스티커는 조금씩 디자인을 변경하는데, 스티커만 모으는 단골손님도 있다. 한국 커피가 대중화한 시점을 ‘믹스커피의 등장’이라 생각해서 그와 닮은 라테 메뉴를 힘줘서 연구했다고 한다. 산미 있는 원두와 스팀한 우유의 조합이 은은하다.
“예술과 창작에 몸담은 친구들과 같이 운영해요. 처음엔 몰랐지만 가게를 운영하면서 책임감과 전문성을 배우고, 그게 다시 인생의 밑거름이 돼요. 커피는 음료 이상의 문화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희의 라테나 커피로 손님들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고, 저희도 보다 넓은 의미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아나가는 게 목표예요.”
위치 서울시 중구 을지로 157
위치 서울시 중구 을지로35길 26-1
위치 서울시 중구 충무로 72-1
위치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12길 16-6(커피한약방), 16-9(혜민당)
- 글·사진 전유안_칼럼니스트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뉴트로’ 원천, ‘복고 서울’ 만나기
위치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27
- ‘눌러 짠다’는 뜻의 일본어. 원형 금속판을 고정해 고속 회전하며 눌러 모양을 만드는 과정.
- ‘녹로’의 일본식 발음. 재료를 축에 붙인 뒤 회전시켜 성형이나 표면을 가공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