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혹은 ‘혼자’ 즐기는 여가 문화
갑자기 생긴 여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난감하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무료한 일상을 고민하는 이들이 고유의 취향을 계발하고 취미를 즐길 방법을 찾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여가 문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한국사회에서도 조금씩 ‘우리’보다 ‘나’를 위한 문화를 즐기는 발판이 마련되는 모양새다
‘관계 모임’에서 ‘취향 공유’로
직장인 김동규 씨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저녁 러닝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1회당 5,000원의 참가비를 내고 일정 시간 한 장소에 모여 호스트의 주도하에 운동을 한 후 헤어진다. 회차별로 참석이 가능하며 매번 참석자도 다르다. 친목이 아니라 오직 운동을 목적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김 씨는 “‘불필요한 ‘치맥’ 모임이 없다’는 소개에 이끌려 참가했다”며 “지인들과 운동하려면 서로의 상황에 맞춰야 해 결국 또 다른 부담이 되는데 오로지 나만의 여가를 즐길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김 씨뿐 아니라 최근 클라이밍부터 가죽공예, 케이크 만들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생산적으로 여가를 보내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연결해주는 스마트폰 앱도 성장하는 추세다. 2013년 서비스를 시작한 ‘프립’은 2016년 앱을 출시한 후 회원 수가 44만 명으로 늘었다. ‘프립’을 통해 루프탑 요가 클래스를 운영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얼리브라운지’의 박은호 프로그램 매니저는 “스트레스로 지친 직장인에게 ‘대안이 되는 삶’을 모토로 강좌를 제공한다”며 “혼자 와도 어색하지 않도록 교류할 수 있는 라운지를 마련해 차별화했다”고 말했다.
숙박 서비스로 시작한 에어비앤비도 2016년 소셜 액티비티를 연결하는 플랫폼 ‘에어비앤비 트립’을 출시했다. 여행자를 위한 투어 프로그램은 물론 요리, 세라믹, 공예 등의 강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에서 약 200개가 운영 중이다. 통계청의 사회조사를 보면 여가가 생기면 하고 싶은 활동으로 취미와 자기계발을 꼽은 사람이 2015년에는 34.2%였는데, 지난해에는 46.4%로 증가했다.
흥미로운 점은 단체 생활이나 관계 형성에 중심을 뒀던 여가 문화가 다양한 공유 플랫폼의 등장으로 점차 개인의 취향과 기호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4월에 문을 연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취향관’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사교공간이다. ‘일상을 취향으로, 취향을 일상으로’를 모토로 내건 취향관은 예술, 사진, 책 등의 주제로 모임을 갖는다. 참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이나 직업, 나이를 모르지만, 공통의 관심사와 ‘기꺼이 대화할 의사’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다.
1 예술, 사진, 책 등의 주제로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사교공간 ‘취향관’.
2 씨네Q 신도림점의 혼영족을 위한 상영관.
나들이, 데이트에서 ‘나 홀로’ 감상으로
“정시에 퇴근해 갑자기 시간이 생길 때 가끔 참여형 연극을 혼자 보러 가요. 나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무대에 참여하는데 완전 짜릿해요.” 직장인 정민지 씨는 혼공·혼영족(혼자 공연·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공연과 영화를 즐긴다는 정 씨는 시간과 취향 선택의 자유로움을 혼공·혼영족이 된 이유로 꼽았다. “서로 일하는 장소나 시간이 다르니 지인들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고, 상대방의 취향까지 고려하려면 더 맞추기 어렵다”며 “내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고, 더 크게 웃거나 마음껏 울 수도 있는 혼영·혼공이 언제부턴가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CGV리서치센터와 롯데시네마의 통계를 봐도 1인 관객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2012년에는 CGV를 찾은 1인 관객이 전체의 7.7%에 불과했던 반면, 2014년 9.2%, 2016년 13.3%로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에는 17.1%에 이르렀다. 롯데시네마도 2013년 8.1%였던 1인 관객이 지난해 12.5%까지 늘어났다.
연극, 뮤지컬, 콘서트, 오페라, 무용 등 티켓 가격이 비교적 비싼 공연계에서는 혼공족의 비중이 훨씬 높다.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1인이 티켓 1장을 구매한 비중이 2005년 11%에서 지난해 43%로 절반에 가까운 수준으로 증가했다. 과거에는 연인 간의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로 영화관, 공연장을 찾는 관객이 대다수였다면, 이제는 작품 자체를 즐기려는 1인 관객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흐름에 따라 관련 마케팅도 생겨나는 추세다. 최근 개관한 서울 영등포구 ‘씨네Q’ 신도림점은 아예 혼영족을 위한 상영관을 마련했다. 리클라이너(전자동 각도조절) 의자 30석 규모의 프리미엄 상영관(7관)에는 좌석마다 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의자의 각도를 높이면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스크린뿐. 타인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휴대전화 불빛에 방해를 받을 일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오더라도 영화관에서는 철저히 혼자 영화를 봐야 한다.
공연계에서도 혼공족을 겨냥한 마케팅이 종종 진행된다. 지난해 2월 <삼성카드 스테이지> 공연에는 혼공족을 위한 전용석이 마련됐다. 공연제작사 신시컴퍼니도 뮤지컬 <아이다> 공연에 1인 예매 관객에 한해 전시회 티켓 등 경품을 제공했다. 인터파크도 지난해 추석 연휴 한 공연을 여러 번 보는 ‘회전문 관객’과 혼공족을 대상으로 경품을 추첨했다.
1, 3 얼리브라운지.
2 얼리브라운지는 ‘프립’을 통해 루프탑 요가 클래스를 운영한다.
저녁이 있는 삶, ‘혼족’ 시대 열릴까?
근무의 연장이라 여겨지던 회식, 사내 동아리 문화가 줄어들고 혼자 문화를 즐기는 ‘혼족’이 증가하는 추세와 맞물려 심야 상권도 하락세다. 통계청의 통계를 봐도 지난해 주점업의 생산지수는 100.1로, 2008년 135.4와 비교해 대폭 하락했다. 반면 커피나 과일주스 등 ‘비알코올 음료점업’은 같은 기간 87.2에서 135.2로 올라 두 업계의 상황이 역전됐다. 최근 주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하는 기업이 늘고, 불필요한 회식을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가 혼족 시대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은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3년 커버스토리로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을 다룬 바 있다. <타임>은 밀레니얼 세대가 기성세대의 눈에는 이기주의자로 보이지만,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와 기술을 접해 거대 기관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척자라고 진단했다. 방송사와 유튜버, 언론사와 블로거가 경쟁하고, 산업 전체를 앱 제작자가 위협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9·11 테러,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나 아랍의 봄 등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불안정한 시대 상황을 겪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않은 이들은 시스템과 싸우기보다 ‘실용적 이상주의자’를 자처한다. 이념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행동가’이며 낡은 시스템이 해체되는 흐름에 적응한 신인류다.
최근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화제를 모은 1989년생 바텐더 오카시오 코테즈는 밀레니얼 세대에 호소한 경우다. 그는 기성 정치인이 “우리 동네에 살지도 않고, 자녀를 우리 학교에 보내지도 않는다. 우리가 마시는 물, 공기조차 공유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풀뿌리 선거운동을 했고 서민 계층의 실질적 변화를 외쳤다. 그 결과 유색인종 여성이 민주당 10선 의원을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국내의 ‘소확행’ 바람도 이 흐름과 멀지 않다. 거대한 이념에 호소하고 시스템을 바꾸려 하기보다 개인과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중요시하고 실질적 의미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더 활발해질 것이다.
개별 취향에 따른 여가 문화 다양화 대비해야
이러한 개인주의의 강화는 더 이상 우려해야 할 흐름이 아니다. 롯데시네마가 2016년 하반기 개봉 영화 중 혼영족이 선호한 영화를 조사한 결과,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 순이었다. <아가씨>를 제외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평단에서는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즉 1인 관객은 상대방의 취향을 고려하는 가족, 연인 관객보다 과감한 취향 선택이 이뤄지므로, 개별 취향에 맞춰 더욱 다양한 콘텐츠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다만 이런 콘텐츠를 국내 산업이 충실히 제공할 수 있는지는 우려해야 할 부분이다. CGV리서치센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개봉 영화 관객 수 상위 10개 작품 중 혼영족 비율을 비교했는데,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본 <신과 함께-죄와 벌>, <택시운전사>는 8, 9위로 밀려났다. 1위는 <범죄도시>(19.5%)였지만 그다음으로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18.3%), <킹스맨: 골든 서클>(17.3%) 등 마니아층이 두터운 프랜차이즈 외화가 높은 순위에 올랐다. 국내 영화계가 여전히 개별적 마니아를 위한 영화보다는 기존 흥행 공식에 충실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20, 30대는 스마트폰 앱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손쉽게 취미와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지만, 중·장년층이 여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지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사실상 50대 이상이 서울시 인구의 21.9%가량을 차지하지만,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통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2016년 설립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50대 이상 세대의 재취업 및 여가를 위한 강좌를 제공한다. 또 자치구별 문화센터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더욱 다양한 취향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으로 다가올 여가 문화의 변화는 사실상 예견됐던 일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유행어가 됐고, ‘워라밸’이라는 단어도 생겼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없었던 기성세대의 논리는 젊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기성세대에게도 이제 제대로 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새로운 여가 문화의 흐름이 생겨나면서 문화산업은 물론 주점, 카페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에게까지 엄청난 변화가 일 것으로 예상된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여가 문화가 안착되고, 산업도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정확한 분석과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다.
- 글 김민 동아일보 기자
- 사진 제공 얼리브라운지, NEW, 취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