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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5월호

예술은 모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예 술 , 치 유 의 매 개 자
“천상과 지상에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네.”
햄릿이 자신의 친구 호레이시오에게 읊는 대사이다. 이때 햄릿이 말하는 ‘더 많은 것들’은 천상과 지상을 이어준다고 르네상스 시절에 유럽인들이 믿었던 ‘예술’이다. 천상과 지상을 하나로 인식했던 시절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그렇게 찾아온 것이 바로 근대이다. 근대는 철학자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듯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절대 고독자로서 개인을 등장시킨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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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근대의 조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근대인이다. 이 근대인은 설령 종교가 있다고 할지라도 무신론자이다. 왜 무신론자인가. 보이지 않는 신을 믿기 위해서 일단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심하다가 회개하는 것, 여기에 신을 믿는다는 논리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말하자면, 회개할 증거가 없다면 신을 믿을 수 없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런 아이러니는 ‘실재의 응답’과 관련되어 있다. 간절히 원하던 것이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그 ‘응답’을 중심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이 자아야말로 증상이고 쾌락이다. 우리가 즐기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원하는 자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아를 원하는 방식대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예술, 진실의 거울

이 자아를 ‘예술’이라는 거울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바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육체를 예술이라는 거울에 비춰보면서 ‘인간주의’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무슨 의미일까. 한마디로 예술은 자아를 그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자아라는 것은 단순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르네상스시기에 즐겨 그려졌던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engere)라는 주제는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지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예수의 육체는 지상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미 ‘영적인 것’이다. 만질 수 없는 ‘영적인 것’을 표현하는 지상의 거울이 ‘예술’이다. 중세 유럽에서 만들어진 영육의 분리라는 이원론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마음에 새겨진 병은 이런 영육 이원론의 현대판이지 않을까. 어떤 이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은 다시 거론하기 힘든 외상을 대면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예술적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예술의 치유 기능을 분리해서 ‘예술 테라피’라는 분야를 새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치료의 목적만이 예술적 치유의 가능성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예술 자체가 치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독일군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마을의 아비규환을 그렸다. 후일 독일 점령군 장교가 피카소의 화실을 방문해서 “누가 이 그림을 그렸소?”라고 묻자, 피카소는 “바로 당신들이 그렸소”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이런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일화에 담긴 의미는 예술이야말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피카소는 전쟁의 참화를 겪은 마을 주민들의 고통을 그림을 통해 공유함으로써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피카소의 그림이라는 거울은 그림자를 비춰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똑같아짐으로써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험의 공유를 통한 예술의 치유

우리에게도 세월호 참사의 기억은 지우기 힘든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고통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감추려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고통은 유가족에게는 자식을 잃은 상처로 인한 것이겠지만, 이 참사를 지켜본 대다수에게는 국가의 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자신들을 기탁할 국가의 부재라는 문제는 ‘국민’이라고 호명되어왔던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이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이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생생한 까닭이다. ‘국민’으로 불려왔던 이들이 자신을 불러줄 국가의 부재를 확인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그들의 고통을 넘어 ‘나’의 고통으로 전이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전이의 경험은 ‘노란 리본’을 부착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공유될 수 있다. 이 공유의 행위야말로 예술적인 것이다. 굳이 예술작품을 제작하고 감상하지 않더라도 이처럼 경험의 공유를 통해 예술적인 것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술가 자신들이 고통을 공유해서 형식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술가가 아니라 향유자의 위치에 있는 대중들도 예술적 퍼포먼스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의 공통성이 크면 클수록 치유의 움직임은 더 힘을 얻는다. 그럼에도 예술이 직접적인 치료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치료가 아니라면 어떻게 예술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해주는가. 예술은 자아의 증상을 보여줌으로써 상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가는 치료사일 수는 없다고 해도 여전히 고통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매개자인 셈이다.

글 이택광_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그림 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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