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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0월호

다시 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

복수復讐 서사는 부침 없이 유행했다. 최근의 복수극 열풍은 분명 일상화되고 있는 재난과 폭력, 그리고 한없이 무력한 공권력과 사법 시스템에 대한 환멸을 반영할 터이지만, 서사의 역사에서 복수가 뿌리 깊은 테마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요컨대 복수에 대한 염원은 동시대적인 동시에 고전적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복수 서사의 창작 열풍 속에서 고전적 복수 서사의 귀환을 목격하게 되는 까닭일 터다.

2016년 영국에서 초연한 지니 해리스Zinnie Harris 작 <이 불안한 집This Restless House> (8월 31일부터 9월 24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은 바로 복수 서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기원전 458년)을 각색한 작품으로, 동시대적 정동에 응답하여 소환된 고전적 복수 서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돌아온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도, 현재의 이야기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던 복수 서사의 종결 가능성을 질문한다. 정말 그 지난한 복수가 끝났느냐고, 그리하여 당신의 세계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으냐고, 당신들은 마침내 안식에 이르렀냐고, <이 불안한 집>은 - 장장 5시간의 상연 시간 동안 - 참으로 착실하게 묻는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이야기부터 해 보자. 「아가멤논」,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아버지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시작으로, 딸의 죽음에 분노한 어머니가 아버지(와 그의 정부)를, 아버지의 죽음을 되갚기 위해 아들이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하는 이야기다. 한 문장 안에 담았지만, 이 참혹한 복수의 연쇄는 거의 2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지며, 더욱이 이 집안에 드리워진 친족 살해의 저주를 모두 살피려면 훨씬 더 긴 시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토록 지난한 악순환은 마지막 살해자 오레스테스에 대한 신들의 재판으로 중단되는바, 『오레스테이아』는 복수란 본디 저주처럼 이어지고, 기이하게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며, 결코 인간은 이 악순환을 끊어낼 수 없다는 독해를 촉발한다. 신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 집안을 덮친 불안은 영원토록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지니 해리스는 바로 이 상상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 아이스킬로스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찌르는 칼을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딸 엘렉트라에게 쥐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고전 서사의 주변부에 있던 여성 인물에게 주목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복원하는 동시대 각색의 비근한 예시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해리스의 설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완전히 새로 쓴 3부에서 여전히 안식에 이르지 못한 엘렉트라가 현대의 정신병동에 감금된 ‘미친 여자’로 등장하는 것. 즉 원작의 오레스테스가 여느 남성 서사의 주인공들처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행위를 승인받아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과 달리, <이 불안한 집>의 엘렉트라는 ‘미친 여자’가 되어 서사의 종결을 영원토록 유예한다. 이처럼 해리스는 서사의 역사를 산뜻하게 부정하는 대신, 서사의 장구한 역사와 끈질기게 대화하며 생경한 출구를 탐색해 나간다.

주지하다시피, 서사의 역사에서 ‘미친 여자mad woman’는 유례 깊은 은유다. 가부장제가 허락한 수동적인 조력자의 자리를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를 선택하는 여성들은 ‘미친 여자’로 불렸고, 미쳤다는 이유로 유폐되었다. 재산도, 육체도, 이름도 빼앗긴 채 감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망각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 아니 앙투아네트처럼 ‘태양’ 같은 여자들은 미친 여자로 낙인찍혀 추방되었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샬럿 브론테 다시 읽기를 시작으로 19세기 여성문학을 고찰한 페미니즘 문학 이론서의 고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1979의 저자 샌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전 구바Susan Gubar가 40여 년 만에 출판한 후속작의 제목이 『여전히 미쳐 있는』2021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길버트와 구바가 여성 작가들의 광기를 변호하는 데서 그치지 않듯, 해리스 또한 ‘미친 여자’ 엘렉트라의 참혹한 처지를 연민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미친 여자’로 오인되어 유폐되었기에, 서사를 완결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머물렀기에, 엘렉트라가 열어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좇아간다. ‘미친 여자’와 ‘미친 여자’의 만남이라는 가능성이다.

‘엘렉트라와 그녀의 그림자’라는 부제를 가진 3부에서 엘렉트라는 자신과 꼭 닮은 오드리를 만난다.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으나 방치한 그녀는 오랜 치료 끝에 정신과 의사가 되었지만, 또다시 죽음의 원혼들에게 쫓기고 있다. 오래도록 부정하려고 애써왔으나 기어코 돌아온 고통 속에서, 결국 오드리는 엘렉트라와 함께 죽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미친 여자’ 이야기에 허락되는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서사의 종결을 현재까지 유예해도 그 과정에서 ‘미친 여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져도 이 결말은 크게 달라질 수 없는 것일까? ‘이야기 세계’의 경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상상은 여기까지라고 판단했던 것인지, 해리스는 더욱 거침없는 월경越境을 단행한다.

재판이 열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들의 재판이 아니라, ‘자연’이 허락한 재판이다. 신들보다 이 세계에 더 오래 있었고 ‘코러스’라 명명되는 뭇 인간들이 사라져도 이 세계를 이어갈 ‘자연’, 즉 신과 인간이 시작과 끝이자 전부라고 여기는 ‘이야기의 세계’를 훌쩍 초월한 존재가 재판을 승인했다. 그 재판의 말미, 첫 번째 희생자 이피지니아가 등장하여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확하지 않은 말들을 쏟아낸다. 그녀의 독백을 한참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 긴 세월 정작 아무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음을, 복수라는 돌진하는 서사를 수행하는 데 급급하여 그녀를 애도하지 않았음을. 불현듯 일찍이 아가멤논의 귀환을 알리던 파수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건 정상이 아냐.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진행이. 사이가 없잖아.” 그렇다, 문제는 복수가 아니라 복수가 상실을 애도하는 시간을 삭제해버렸다는 점이다. 서둘러 선언된 ‘애도의 종결’이 영원토록 지속된 고통의 시작이었다.

기실 앵거스 플레처Angus Fletcher에 따르면, 복수 서사는 상실의 아픔을 신속하게 바로 잡으려는 시도로 고안되어 점점 더 정교하고 잔혹해졌는데, 바로 그 시작이 『오레스테이아』였다. 하여 해리스가 『오레스테이아』를 다시 씀으로써 궁극적으로 심문에 부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상실에 대처하고 빠르게 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지난 2500여 년 동안 발전시켜온 이야기 세계의 ‘발명품’들이지 않을까. 복수 서사를 비롯하여, 마땅한 애도조차 허락되지 않는 죽음들을 양산하며 긴박하게 전개되다 기어코 깔끔한 결론에 도달하는, 그 간결하고 정연한 서사 형식을 지탱하는 수사修辭들 말이다.

5시간의 대장정 끝에 오드리가 말한다.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그걸 안고 살아갈 수 있다”고. 두려움으로 상실을 외면하는 대신, 죽음과 죽음이 남긴 상흔들로 가득한 세계로 난 창문을 열어젖혀 죽음들과 대면하고, 그 죽음들에 얽혀 있는 나의 책임을 직시하기를 제언하는 것이다. 그 죄책감을 안고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고, 아니 그 죄책감을 품을 때야 비로소 이 지난한 이야기와 결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독려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고도 그 이후를 이어 쓰겠다고 결심한 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참으로 정직하고 사려 깊은 전언이 아닐 수 없다.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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