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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3월호

서커스, 일상적 감각과 지각을 돌파하는 몸들

극한의 몸이 불러일으키는 감각들

최근 프랑스 무용계에서는 서커스를 무용의 장場으로 포섭하려는 적극적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이는 서커스를 무용의 또 다른 가능성 혹은 무용의 확장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커스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감각과 지각에 더욱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서커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나 경험은 모두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서커스는 ‘놀라운’ ‘극한의’ ‘기상천외한’ ‘말도 안 되는’ ‘경이로운’ ‘아슬아슬한’ 같은 표현으로 수식되곤 한다. 이는 어떤 것이 서커스로 성립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반돼야 하는 감각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한다. 서커스를 수행하는 몸은 일상적인 몸과는 확연히 다른 목표를 갖는다. 이 몸들은 떨어지기 위해 올라가고(차이니즈 폴), 공중에 몸을 던지기 위해 그네를 타며(공중그네), 무한한 수의 던지고-받기를 꿈꾸고(저글링), 가장 높은 곳에서 최대한 위태롭게 걷길 원한다(외줄 타기). 일상적 움직임에 반하는, 다시 말해 중력을 거스르거나 버텨내려는 몸을 보며 사람들이 경탄을 내뱉는 것은 이 모든 행위가 평범한 몸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극한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커스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신체를 인지하는 일반적 감각과 지각을 돌파하며 일상적 몸과는 ‘다른’ 몸으로, 불가능을 실현한 뒤 유일성을 획득한 ‘독자적인’ 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낸다.

라시드 우람단Rachid Ouramdane 〈Corps extremes〉(극한의 몸, 2021) 공연 사진.
하이 와이어High wire, 핸드 투 핸드Hand to hand 서커스 아티스트들과 무용수들이 함께한 작품이다. ⓒPascale Cholette

‘새로운’ 몸에 대한 상상을 실현하는 서커스 도구

반면 맨몸으로 보편적 신체 경험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커스 예술가들은 다양한 도구를 자신의 신체와 결합하면서 더 많은 수의, 더 다양한 경우의 ‘불가능’을 탐색한다. 씨어 휠, 타이트·하이 와이어, 차이니즈 폴, 롤러 볼러, 에어리얼 실크·슬링·로프·후프·스트랩, 티터보드, 트램폴린 등 낯선 이름은 모두 서커스에서 사용하는 도구의 명칭이다. 각각의 도구는 원심력·장력·중력·상하운동·낙하운동 등의 특징적 운동성을 갖는다. 도구가 가진 운동성은 신체가 가하는 힘에 의해 드러나게 되고, 도구에 올라탄 신체는 이 운동성을 활용해 높이·넓이·빠르기 등을 변화하며 도구가 없는 순수한 육체로 구현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실제화한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몸으로는 회전을 하는 동작에 빠르기나 횟수에 있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심력을 사용해 회전운동을 하는 씨어 휠을 이용한다면 일시적으로 중력을 분산해 더 많은 회전과 더 빠른 속도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서커스 예술가는 기존의 서커스 도구를 변형하거나 다른 도구와 결합해 자신만의 새로운 도구를 개발 및 제작하는 추세이다.
흥미로운 점은 서커스 도구가 인간의 놀이 도구 혹은 놀이 행위를 유발하는 주변의 사물과 무척 닮았다는 것이다. 공중그네-그네, 차이니즈 폴-나무 타기, 타이트 와이어-담벼락 걷기, 에어리얼 후프-훌라후프, 트램폴린-방방, 에어리얼 슬링-해먹, 디아볼로-요요 등 서커스 도구는 대체로 인간의 놀이 도구를 원형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 유사 서커스 사물을 경험한 적이 있는 다수의 관객은 해당 사물이 일으키는 움직임에 대한 경험을 인지한 채 공연을 보게 된다. ‘안다’는 것은 눈앞의 서커스를 수행하는 신체가 직면한 위험을 예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므로, 그 위험을 돌파해 승리하는 신체에 대한 경이로움을 갖게 된다. 반대로 서커스 도구의 특성이나 작동 원리가 관객의 경험을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 관객은 서커스를 수행하는 신체가 처한 어려움을 인지할 수 없으므로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이때 서커스는 감탄보단 의아함을 양산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관객은 서커스를 하는 몸을 보며 자기 자신의 몸(경험)을 경유해 그 몸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서커스는 일방적으로 자기 신체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그 너머로 끊임없이 감각을 공유하는, 감각의 상호작용으로서 존재하는 예술인 셈이다. 프랑스 무용계가 서커스에 초미의 관심을 두는 이유는 서커스의 몸이 무용의 몸과 달라서가 아니다. 그 육체성은 동일하지만, 서커스를 하는 몸이 일으키는 감각, 관객의 몸에 누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감각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커스는 관객이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행위의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거쳐 가며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에,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다. 관객이 자신의 몸을 감각하게 만드는 그 몸을, 무용이 욕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박다솔 [춤in] 편집위원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되었습니다. 원문은 웹진 [춤: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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