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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돈암지구‘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은’ 집
돈암동, 성북동, 삼선동, 동소문동, 보문동, 안암동, 동선동 일대의 돈암지구에는 겉으로 보면 한옥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이 불가능한 건물들이 자리한다. 오랜 세월을 지나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은, 대량생산된 한옥일지라도, 한옥으로서의 가치와 보존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관련사진

1, 2 돈암지구 한옥밀집지역 내의 ‘신흥목공소’와 ‘신흥전파사’, 2019.

“(19)50년대 초, 내가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한 동네(동선동)는 좁고 꼬불탕한 골목 안에 작은 조선 기와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붙어 있는 오래된 동네였다.”1) 소설가 박완서는 실제로 동선동 한옥에 살았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은 그 집에서의 생활을 기반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50년대 돈암지구와 동선동의 도시 경관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한옥을 새싹이 돋는 마당이 있는 ‘땅집’, 조선 기와지붕이 덮인 ‘기와집’, 소설이 쓰인 당시(2004)의 현재적 용어인 ‘한옥’ 등 다양한 시점으로 50여 년의 한옥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잘 드러냈다. 박완서는 2000년대 동선동 일대의 도시 경관을 그가 살았던 1950년대와 비교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사라지는 기억 속의 도시 경관을 개탄한다. “그 동네도 한옥은 얼마 남아 있지 않거니와 남아 있는 한옥도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고 카페나 패스트푸드점, 의상실 등으로 구조 변경을 한 집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대학이 들어섰으니까 주택가가 대학촌으로 변한 건 당연지사라 하겠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게 그 자리에 그냥 있었던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2) 실제로 동선동 지역은 길가에서는 한옥인지 구분조차 불가능한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은’ 가게들이 하루가 다르게 상호를 바꿔가며 자리하고 있다. 박완서는 경험에서 우러난 기와지붕의 관리에 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며, 2000년대 한옥 보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조선 기와지붕은 손이 많이 간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제대로 된 기왓장을 구하기도 어렵다. 예전에도 기왓장이 품삯은 미장이의 세 곱절은 됐다. 기술은 안 이어받고 품삯에 대한 풍문이나 믿는 얼치기나 걸리기 십상이다. 도심의 빌딩 숲 사이에 어쩌다 남아 있는 조선 기와지붕의 그 참담한 퇴락상을 보면 전통 가옥 보존 어쩌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무책임한 개수작이라는 걸 알 것이다.”3) 기와지붕은 한옥의 상징이다. 조선시대에는 기와집, 초가집, 너와집 등 지붕의 재료로 집을 구분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옥에서 기와지붕은 재료 특성, 소성 기술, 구법 등에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박완서가 기술한 대로 기와집은 주기적으로 기왓장을 갈아줘야만 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 2000년대 전통 가옥 보존은 북촌 등 특정 지역에만 해당됐다. 작가가 동선동(돈암지구)의 퇴락상을 보며 한탄했을 만하다.

‘기와집’, ‘조선집’ 그리고 ‘한옥’의 의미

한옥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조선시대 기와집 정도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와집은 사대부가 사는 소수의 규모가 큰 주거 양식이었을 뿐이고,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기와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작은 규모의 기와집이다. 일반인들의 한옥에 대한 인식은 일제강점기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 경성의 인구 급증으로 주택난이 심각했고, 이에 주택 공급을 위해 도성 내에서 시작해 도성 밖까지 대규모로 개발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주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기와집 형식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조선집이라 불렀다. 다만 조선시대 집과는 달리 밀도가 높아지고, 생활방식이 변화된 도시에 적합하게 새롭게 개발됐다4) ‘경성시가지계획령’으로 조성된 ‘돈암지구’는 기와집이 대량생산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신도시였다.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은 ‘신흥목공소’의 가치

80여 년의 세월이 느껴지는 신흥목공소의 간판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가옥 수리’, ‘보이라’, ‘실내 장치’5)라는 단어들이 있다. 이렇게 덧붙여진 간판들로 인해 조선 기와지붕만이 간신히 보인다. 신흥목공소의 필지는 동서 방향의 일본식 블록 구조의 모서리에 위치해 ‘가각전제’라는 근대적 도시계획법이 적용되어 모서리가 사선으로 잘렸다. 따라서 한옥도 네모반듯한 정형이 아니라 비정형이다.6)
이런 비정형의 필지와 한옥에는 당시 대량생산된 한옥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옥은 기와집으로 둘러싸인 네모반듯한 마당을 관념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비정형 필지에 구현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비효율적이고,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럼에도 억지스러워 보일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 기와집은 우리의 수백 년의 주거문화7) 와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며 적응했으며, 지금 이곳에 기와지붕을 덮고 여전히 서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흥목공소는 한옥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지켜야 하는 전통 가옥이다.

  1. 박완서, <그 남자네 집>, 도서출판 세계사, 2012, ‘작가의 말’ 중. 박완서는 돈암지구의 중심 지역인 동선동과 보문동에 살았다. 이 소설은 2004년 발표되었고, 그가 동선동 한옥에 살았던 1950년대를 회고하는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1950년대 돈암지구 동선동 일대의 도시 경관, 한옥, 일상생활이 세밀하게 기록된 중요한 자료다.
  2. 박완서, 같은 책, 18쪽.
  3. 박완서, 같은 책, 30쪽.
  4. 도시적으로는 도시화에 따라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했으며, 규모 또한 최소화하며 대량생산 구조를 갖추려 했다. 건축적으로는 거실, 복도, 서재 등 신식 공간과 위생 개념이 도입되면서 재래식 가옥을 개선하려 했다. 사회적으로 신분사회가 사라지면서 만들어진 이 한옥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형식을 형식적으로나마 갖추려 했다. 현재는 이 집을 한옥이라 지칭한다. 한옥은 1908년 비교적 양옥이 많았던 정동 지역에서 양옥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다. 1970년대 정부와 언론 등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한옥을 현재와 같이 정의해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불과 15년 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5. ‘가옥 수리’보다 ‘집수리나 주택 수리’로 변용되었고, 영어 ‘Boiler’의 일본식 표현인 ‘보이라’는 이제 사용하지 않으며, ‘실내 건축’을 뜻하는 ‘실내 장치’는 영어 그대로 ‘인테리어’로 사용한 지 이미 오래다.
  6. 돈암지구의 블록 구조는 일반적으로 동서 방향 40×100m로 네 모서리가 가각전제되었고, 일본식 필지 구조로 각 필지는 10×20m로 도로에 면해 폭이 좁고, 깊이가 깊게 계획되었다. 그러나 계획 이후 한옥이 계획되면서 각 필지는 10×10m로 다시 구획되었다. 이에 따라 세로 4개, 가로 10개의 필지로 분할되면서 중심의 2개열의 필지는 도로에 접하지 못한 맹지가 만들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에서 각 필지로 연결하는 막다른 도로를 만들었다. 돈암지구에서만 나타나는 필지 구조의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다세대·다가구는 도로에 면한 필지만을 개발하거나, 도로에 면한 필지와 합필해 개발되면서 블록 중심부의 한옥만 남게 됐다.
  7.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다른 기와집과 마찬가지로 마당을 중심으로 5량 구조의 높은 지붕, 3량 구조의 에워싼 지붕, 남쪽으로 열린 2칸 대청, 꺾이는 부분에 안방, 안방 밑으로 부엌이 위치한 전형적인 경기형민가(웃방꺽임집)이다. 겹처마에 소로수장까지 갖춘 조선시대 사대부가 형식으로 지어졌다.
글·사진 정기황_건축학 박사, 사단법인 문화도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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