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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7월호

삼일로창고극장의 재개관에 부쳐
신화에서 진화로

명동에 위치한 삼일로창고극장은 1975년 개관한 이래 소극장 운동을 이끌며 공연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10년대 중반까지 창작자에게는 실험적인 작품의 발표공간으로, 대중에게는 공연 중심의 문화공간으로 이름을 떨쳤다. 지난 2013년에는 이곳을 거쳐간 여러 문화인들의 헌신과 노력에 힘입어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긴 역사만큼 수차례 존폐 위기를 걷던 삼일로창고극장은 최근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역사를 지속하게 되었다. 기존의 가변형 무대를 그대로 살려 보전하고, 스튜디오형 연습실과 갤러리를 더해 예술가들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관객들과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극장은 한 명의 극장장이나 예술감독 체제가 아닌, 6명의 전문위원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민관 거버넌스 형태로 꾸려진다. 2018년 여름 재개관 첫 프로그램으로는 고 추송웅 배우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오늘날에 맞게 되살리자는 시도로 <빨간 피터들>(기획 이경성 운영위원)이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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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을 보기 위해 에저또창고극장 앞에 줄을 선 관객들.(사진 제공 방태수)

2 1975년 에저또소극장 내부 모습. (사진 제공 방태수)

1970년대 소극장의 신화

1970년대 명동 골목을 배회하던 연극하는 젊은이를 떠올려본다. 그는 명동극장과 드라마센터 같은 공공극장에서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공연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여건에 불만이 가득하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작품을 검열하는 정권에 대한 분노도 크다. 번화가의 다방에서 아주 가끔 동료들과 예술을 논하지만, 내심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고민이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이 거리를 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근처에 작은 스튜디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눈치 안 보고 연극을 마음껏 할 수만 있다면!
마치 평행우주처럼, 1970년대와 2010년대의 젊은 예술가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공연예술은 구성원과의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 훈련을 통해 완성되는 장르이니 그럴 수밖에. ‘공간’ 문제에 대한 나름의 자구책은 늘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한국의 연극사에서 ‘소극장 운동’의 의미와 가치가 독자적인 공간을 갖춘 극단이 그 안에서 나름의 돌파구를 찾은 데서 비롯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떠올렸던 1970년대 젊은 연극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극단 에저또의 대표였던 30살의 방태수 연출가는 성모병원 뒤 2층 가정집을 구입했다. 극장으로 쓰기엔 천장이 낮았기 때문에, 암반으로 된 지하를 조금씩 파내려가는 작업을 단행했다. 그러기를 1년, 오랜 공사 끝에 에저또소극장(이후 에저또창고극장으로 이름 변경)이 문을 열었다. 공사비가 없어서 극단 단원들과 함께 곡괭이로 5개월 동안 땅을 팠다고 하는데, 상상만 해도 한숨과 미소가 절로 교차한다.
그러나 이게 웬걸, 호기롭게 실험극을 내세우며 출발했던 에저또소극장은 단 ‘1년’ 만에 운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이후 이원경 연출가가 유석진 박사의 파격적인 후원으로 극장을 인수하고 ‘삼일로창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한다. 당시 젊은 평론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극장이 세운 몇 가지 운영 방침은 이러했다. 첫째, 연중무휴로 공연한다. 둘째, PD 시스템을 도입한다. 셋째, 창작극 발굴을 우선한다. 넷째, 젊은 극작가와 연출가를 양성한다. 이처럼 지금의 극장들이 삼고 있는 기본 원리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삼일로창고극장은 가히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극장이 보여준 혁신적인 모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 해를 결산하면서 인상적인 작품이나 작가에 창고극장상을 수여하기도했고, 한일 최초의 연극교류 작품이었던 극단 하켄노카이의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기도 했다. 마임을 전문으로 했던 극단 에저또의 영향을 받아 잠깐이지만 한국 마임의 성지 노릇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소극장 역사상 최장의 연속 공연과 최다 관객 동원, 최고 흥행 수익을 기록한 곳이기도 했다. 작고한 추송웅 배우의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1977)은 상연을 시작한지 몇 달 만에 수만 명 관객이 관람하며 연극사에 전무후무한 메가 히트작으로 남았다.

관련사진

3 1975년 에저또소극장 신축개관 기념공연 홍보물.(사진 제공 방태수)

4 1977년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 홍보물.

5 삼일로창고극장 개관 30주년 기념공연 <결혼> 홍보물.

6 예전 삼일로창고극장 모습. (사진 제공 극단 로얄씨어터)

2010년대 소극장의 진화

신화화될 만큼이나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지만, 극장이 자리해온 40년의 시간 속에는 알려지지 않은 여백과 부침도 꽤 있다. 승승장구하던 삼일로창고극장은 1983년에 폐관했다. 그 후 떼아뜨르 추 삼일로극장(대표 추송웅)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기도 했고, 1986년 극단 로얄씨어터(대표 윤여성)에 의해 운영되기도 했으나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잠시 동안 김치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1998년 명동창고극장(대표 김대현)으로 공간을 되찾았으나 다시 운영난으로 폐관했고, 2004년부터는 삼일로창고극장(대표 정대경)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물론 2010년대 들어와서 재정난으로 폐관 위기와 기업 후원을 거쳤고, 역시나 ‘재폐관’을 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정작 신화로 여겨지는 건 극장의 재개관 횟수가 아닐까?)
극장의 궤적을 따져보면 지난 시절 극장을 운영하고 무대를 채웠던 이들의 시도는 다소 모순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이었다. 극장이 선언한 연극 이념에 따라 흥행하던 실험극을 일부러 중단하기도 했고, 극장이 배출한 신인들이 대학로의 주역이 되는 바람에 연극의 변방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상업성과 거리를 뒀지만 의외로 대중적 성공을 이뤄내기도 했고, 자신 있게 극장 간판을 내걸었음에도 공간을 비워야만 했던 시간도 꽤 길었다. 돌이켜보면, 이상적인 만큼 현실에는 부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일로창고극장에는 문화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값진 순간들이 담겨 있다. 그 가치는 당대의 젊은 창작자, 그리고 그들의 헌신에 화답하는 익명의 예술 애호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삼일로창고극장이 ‘문화재’가 아니라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극장 운동의 계승과 지속은 극장을 대표하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지금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사실. 상업 자본으로부터 배제된 ‘가난의 연극사’와 구시대적인 법률에 의한 ‘억압의 연극사’가 중첩된 공간인 ‘소극장’ 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 우리 앞에 주어진 장소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가꿀 것인가? 그렇게 가꾸어진 가치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젊은 예술가와 함께 시민들도 화답해야 할 순간이 왔다. 신화는 이제 그만, 지금은 진화를 모색할 때다.

글 정진세 삼일로창고극장 운영위원
극단문 드라마 작가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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