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예술적상담소

1월호

별자리 운세도 신통치 않을 때예술적으로 상담해드립니다
“똑똑똑… 여기가 ‘예술적 상담소’ 맞나요?”
여러분의 어떤 고민도 예술적으로 상담해드리는 ‘예술적 상담소’.
온라인으로 별도 공간을 마련해 고민 상담을 위한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올려주신 고민에 대한 예술적 대책을 찾아 답변을 달아드립니다.
서울문화재단 페이스북 탭에서 예술적 상담소를 찾아주세요!
다른 사람의 고민에 댓글을 달 수도 있답니다.
채택된 질문은 [문화+서울]에 게재되며, [문화+서울]을 1년 동안 보내드립니다.

예술적 상담소 관련 이미지

예술적 상담소 관련 이미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의 현실 속에서 나만의 19호실을 만들 수 있을까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를 위한 시간, 나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혼자 조용히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시간,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는 시간이 이렇게 소중한 줄 미처 몰랐어요. 최근 한 드라마에서 “자신만의 19호실이 필요하다”1)는 대사를 듣고 정말 공감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행복하지만,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의 현실 속에서 나만의 19호실을 만들 수 있을까요?

예술적 상담소 관련 이미지

19호실의 방어막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 세탁기 앞에 쌓여 있는 빨래들, 소파 위에는 북어처럼 바짝 마른 정리 안 한 옷가지들. 재활용 배출일마다 미적거리다 못 버린 재활용품 쓰레기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아… 나는 여기 안 산다.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다. 나의 고향은 안드로메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일정 수입없이 집에만 있는 ‘집사람’이자,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떼지 않은 새 옷의 가격표시 태그처럼 죄책감이 덜렁 따라옵니다. 그리고 ‘품질표시’, ‘취급주의’ 태그처럼 ‘나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까지. 누가 채찍 들고 서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런 반성을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어느 하나의 노동이라도 시작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인데. ‘하지만 나는 동거인들이 먹은 상을 정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재활용품 쓰레기를 분리하여 버리는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하고 생각하다 말고, 브레이크를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뭘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거지? 뚜렷한 명분이 없네요. 나는 시인이니까, 시를 쓰려고 태어났나? 그런데 사람들은 왜 내 시를 안 읽지? 많은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 것도 내 책임인가? 그러면 돈도 안 되고 인정도 못 받는 시를 나는 왜 쓰지? 시 쓰는 것 말고 내가 잘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였지? 차라리 가사노동을 전문 분야로 인정하고 경력과 이수과정을 학위처럼 대우하며, 정당한 급여를 일정하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혼 후 뚜렷이 내세울 경력 없이 가사노동만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언젠가 어깨를 다쳐 손을 쓰지 못했을 때 진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통증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손을 쓰지 못해 집안 살림은 엉망진창이 되자 극심한 우울감이 몰려왔어요. 그때 파견가사도우미(요샌 ‘생활컨설턴트’, 혹은 ‘매니저님’이라고 합니다.)를 인터넷에서 신청했지요. 그분은 정말 손끝에 신이 내린 듯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가 막히게 저의 살림을 정돈해주고 가셨어요. 그분께 너무 고마워서 “매니저님 집은 늘 반짝반짝 빛날 것 같아요”라고 하니,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집은 살림을 이렇게 놓고 살지 않아요. 살림살이는 정리정돈하기 귀찮아서 다 버렸어요. 식구 수대로 밥공기, 국그릇, 숟가락, 젓가락, 컵 몇 개, 뚜껑 달린 반찬그릇 몇 개만 있어요. 접시, 냄비 같은 것 절대 안 사고요. 집에 손님이 오면 밖에 나가 사 먹습니다. 그릇이 없어서 요리 못 한다고 하면 대부분 이해해요. 저는 살림하는 걸 좋아하는데 우리 집 살림을 하면 아무도 나에게 돈을 안 주더라고요. 이렇게 남의 집 살림을 정리해주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돈도 버니 좋아요.”
저는 그분의 말씀에 무릎을 탁 쳤지만, 왜 그런지 그분처럼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가 ‘자기만의 19호실’을 가지려면 그분처럼 독하게 버리고 살거나, 돈이 많아서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요. 아니면 가정 살림이 엉망이 되는 것은 집에 있는 여자의 책임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에게 ‘우리 엄마는, 우리 아내는 뭐든지 다 잘하는 슈퍼우먼’이라는 소리도 듣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했던 것, 내가 사는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야 하죠. 이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인데, 여자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에요.

판타지에서 빠져 나오기

밀린 가사노동 앞에서 제가 도망치고 싶어서 외우던 저 말들은 헛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나만의 19호실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었을 뿐. 나의 19호실에는 물리적인 벽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만의 19호실로 갈 수 있습니다. 외부 신경 안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곳이면 거기가 바로 나만의 19호실이니까요. 그 최소한의 방어막이 있다면, 가정에서 먼 허름한 모텔에 방을 잡을 필요도, 가족을 속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언제든 내 생각을 펼치고 싶을 때, 가사노동과 가족돌봄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고 배고프면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며 자기가 입고 벗는 옷을 스스로 빨아 널고 찾아 입을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요. 생각해보면 가족구성원들이 조금씩 도와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 가족에게는 엄마이자 아내인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판타지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1)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에 빗대어 한 표현.

답변 유형진_ 시인. 2001년 <현대문학> 등단. 펴낸 시집으로 <피터래빗 저격사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피터 판과 친구들>,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가 있다.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