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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연극, 연극제, 연극 실험의 가능성 살피기 고깃집이 된 소극장, 연극에 희망은 있는가?
3월 대학로극장 폐관, 4월 서울연극제 파행, 6월 연극배우의 사망 등 올해 상반기에 보도된 소식만으로도 한국 연극계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음을 알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서울변방연극제’는 시민 모금으로 행사를 치러냈고 ‘대한민국소극장열전’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몸살을 심하게 앓는 연극계, 연극인들은 어떻게 자구책을 만들어가는지 연극제를 통해 들여다봤다.

소극장 일러스트 이미지

28년 역사의 소극장이 문을 닫자, 그 자리에 고깃집이 문을 열었다. 8월 염천의 개처럼 헐떡이던 날 저녁, 서울 대학로 들머리 이화 사거리의 고깃집을 찾았다. 무대가 이쪽이었나, 저쪽이었나? 관객이 있던 자리엔 주객이 북적였다. 3월 말 이곳에서 정재진 대학로극장 대표는 상여를 멨다. 임대료 압박에 못 이겨 폐관하게 되자 항의의 의미로 벌인 퍼포먼스였다. 대학로 곳곳에는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라는 문구가 붙었다. 하지만 ‘문화융성’을 부르짖는 시대에 ‘정신적 희망’을 만드는 극장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대학로의 봄은 어수선했다. 4월이 되자 연극인들이 아르코예술극장 앞에서 삭발을 했다. 5월까지 계속된 2015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들이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휴관(4. 11~5. 17)으로 파행을 겪었기 때문이다. 서울연극협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와 산하공연예술센터가 연극제를 방해하고 있다”며 정부에 항의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예술행정 원칙은 언제부터 말로만 존재하는 듯했다.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가 공연가에 때아닌 찬바람을 불어넣던 6월, 한 연극배우가 한 평 반 고시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극심한 생활고 때문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곤궁한 처지였음은 분명해 보였다. 자본의 공세와 정부의 간섭이라는 양자의 협공 속에, 지금 우리나라 연극계는 신음하고 있다. 서울연극제 파행을 계기로, 연극계와 지역 연극제의 상황, 그리고 새로운 연극 실험을 거칠게나마 정리했다.

파행의 중심, 서울연극제

예술위와 서울연극협회의 갈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불거졌다. 2015 서울연극제는 지난해 공연예술센터가 운영하는 아르코예술극장·대학로예술극장 대관 공모에서 사상 초유의 탈락 사태를 맞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오랜 역사의 연극제였다. 연극인들은 이에 맞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공연예술센터 고소 등으로 대응했고, 예술위는 서울연극제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올해 초 수시 대관 일정을 조정했다.
하지만 연극인들의 반발은 거셌다. 그 사태를 계기로 ‘예술행정의 공공성’을 요구하는 연극인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올해 초 100명이 넘는 연극인이 집행부도 회비도 없는 토론회 ‘대학로 엑스(X) 포럼’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대관 탈락 사태에서 보듯 공개되지 않고 이뤄지는 의사결정 구조에 대해 반발하며 예술행정의 투명성을 요구”했다. 예술위와 국공립극장 등이 내세우는 ‘공공성’이 “민주적 합의로 투명하게 실현돼야 진정한 공공성” 이라고도 주장했다. 문제는 30~40대 젊은 연극인들의 이런 지적에도 또다시 같은 문제가 되풀이됐다는 점이다. 우선 예술위에서 휴관 결정을 내리면서 공문 외에는 별다른 양해나 설득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박장렬 서울연극협회 회장은 당시 회견에서 “공연예술센터가 대극장 공연을 소극장에서 공연하라는 통보를 했을 때 더 가슴 아팠던 것은 공문과 전화통화만 오갔지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는 점”이라면서 “유령 단체도 아닌데 왜 알 수 없는 행정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연극제 파행은 이미 낡은 단어 하나를 다시 곱씹게 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위)지난 4월, 올해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들이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휴관으로 파행을 빚자, 서울연극협회 간부들이 서울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앞에서 연극인들이 아르코대극장 앞에서삭발을 했다.(사진 제공:서울연극협회) (아래)만종리 대학로극장. 지난 3월 문을 닫았던 대학로극장이 7월말 충북 단양군에서 만종리 대학로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사진은 야간공연중인 셰익스피어 원작의 재개관 연극 <노인과 바다>의 한장면.(사진: 손준현) (위)지난 4월, 올해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작들이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휴관으로 파행을 빚자, 서울연극협회 간부들이 서울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앞에서 연극인들이 아르코대극장 앞에서 삭발을 했다.(사진 제공:서울연극협회) (아래)만종리 대학로극장. 지난 3월 문을 닫았던 대학로극장이 7월말 충북 단양군에서 만종리 대학로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사진은 야간공연중인 셰익스피어 원작의 재개관 연극 <노인과 바다>의 한장면.(사진: 손준현)

지원하는 정부, 간섭은 당연?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연극제에 대한 간섭은 지역에서도 벌어진다. 현재 한국연극협회에는 16개 시도지회가 있다. 이들은 서울연극제와 마찬가지로 부산연극제 등 지역 연극제를 올리고 있다. 이 밖에 대표적인 연극제로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거창국제연극제, 포항바다국제연극제, 춘천국제연극제, 춘천인형극제, 통영연극예술축제, 김천국제가족연극제, 구미아시아연극제 등이 있다. 주로 영남 쪽에 연극제가 집중된 것은 인구가 많아 잠재 연극 수요가 큰 데다, 지역경제가 상대적으로 여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지역 연극제는 길면 2주일, 짧게는 며칠에 그친다. 밀양 정도가 자리를 잡았고, 거창은 ‘돈을 잘못 쓰는’ 바람에 관으로 넘어가 과도기적 상황을 맞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성향이나 지역 특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지역 연극제에서도 일반적으로 관의 입김은 여전하다.
특히 서울연극제의 경우, 공연장에 대관료를 내고 행사를 하지만, 지역에선 대관조차 관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서울연극협회는 1년 내내 다양한 수입활동을 하지만, 거창 등 지역의 경우 1년에 연극제 하나로 수입을 꾸리다보니 경제적으로 더 버겁다. 전국 연극제의 경우에도 지원기관인 예술위가 심사위원 배정에 관여하는 등 독립성이 흔들리거나 훼손될 우려가 상존한다. 지원기관으로서는 감독과 관리 의무가 있지만, 도를 넘어 간섭할 소지가 큰 것이다.
최근 ‘2015서울변방연극제’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시민 모금(4900만 원)을 통해 행사를 치러냈다.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나마 예산 규모가 적어 가능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적게는 몇 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이 드는 연극제에는 적용하기 힘든 ‘예외적 성공사례’다. 보통 연극 한 편을 만들려면 제작비가 소극장에선 5000만 원, 중극장 이상에선 1억 원이 훌쩍 넘어선다. 벅찬 현실이다.

연극을 보는 시각부터 바꿔라!

연극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선 연극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장렬 회장은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주문했다.
“소극장 연극에 대해 1편당 2000만~3000만 원을 지원하더라도, 배우나 스태프는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게 현실이다. 공연예술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연극과 연극인을 이렇게 방치하고서 과연 우리 삶의 정신적 부분을 얘기할 수 있는가. 국가가 복지, 복지 하지만 연극이 정신적 복지의 화두라면, 예술가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상업연극이 아닌 순수 공연단체들은 홍보비용조차 감당할 수 없다. 공연예술의 홍보 마케팅부터 정부에서 도움을 줘야 한다. 상업연극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순수 예술인을 보호하는 국가적인 지원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박 회장은 이번 가을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순수공연예술창작연합회’(가칭)를 만들어 대책을 마련할 생각이다.
사실 연극계에서 연극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계속돼왔다. 한국연극협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한국연극>(2014년 3월호)은 ‘지역연극 활성화를 위한 정책 제안’ 좌담회에서 여러 현안을 짚었다.
연극계, 학계 전문가들이 두루 참여한 이 좌담회에서 나온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지역의 공연 공간과 극장의 인프라는 확보돼 있는데, 지역 창작자의 부재로 지역연극이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연극 창작자를 집중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 지역 연극인들은 전문 기획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기획과 홍보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고 육성해야 한다. ▲ 서울과 지역의 교류가 아니라 지역과 지역이 교류해야 한다. ▲ 지역 연극 정보 교류와 지역의 관객과 공연단체를 이어주는 교량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 지역 극단의 관객 확보를 위해 지방정부와 공무원의 협조가 필요하다. ▲ 지역 기반의 예술 프로그램이 개발돼야 한다. ▲ 지역 전문극단을 육성해야 한다. ▲ 지역의 문화예술회관 운영에 지역 연극인들이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녹록지는 않다.

일러스트 관련 이미지

지역발 희망, ‘대소열’의 도전

과연 한국연극에 희망이 있는가? 큰 줄기는 아니지만 ‘작은 촉’이 하나 삐죽 고개를 들었다.
“척박한 토양에 햇살 한 줌, 그 땅에 씨앗을 심는 마음.” 김남석 연극평론가는 ‘대한민국소극장열전’(이하 대소열)을 이렇게 표현했다. 대소열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연을 시작해 마지막으로 한 지역에서 모든 단체가 모여 공연을 한다.
대소열은 부산(공간소극장), 대구(한울림 소극장), 구미(소극장 공터-다), 광주(씨어터 연바람), 전주(아하 아트홀), 대전(소극장 핫도그), 춘천(봄내극장), 안산(극단걸판) 등 8곳이 각자의 레퍼토리 공연을 지역별로 돌아가며 선보이는 소극장 교류 축제다. 2010년 공간소극장 등 4개 소극장이 시작한 것이 5년 뒤 8개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아예 ‘대한민국소극장열전’ 협동조합을 만들고 축제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2014~2015년 겨울에는 합동 작품을 제작했다. 2015년 대소열은 6월 19일 광주, 구미에서 공연을 시작해 22일 부산에서 모든 공연을 집결해 선보였다. 좀 더 실질적이고 내실 있는 행사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협동조합 실험에도 나섰다.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체를 갖춤으로써 수입 적립 등을 통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대소열에 참여하는 극단 걸판의 오세혁 연출가는 “지금 대소열의 나머지 7개 소극장은 자체 극장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극장을 갖고 있지는 않다. 소극장이 있더라도, 극장의 모든 프로그램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건 아니다. 8개 극단이 자기 지역에서 수입을 적립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공동으로 서울에 소극장을 한 곳 마련하려고 한다. 가칭 ‘대소열극장’이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지역 소극장과 극단의 살길 하나가 제시된다. 제작 프로그램의 교류와 공동극장 설립이다. 마치 유럽의 제작극장 방식을 벤치마킹이라도 한 것 같다. 유럽의 제작 극장들은 각자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웃 나라 극장의 페스티벌에서 잇달아 공연한다. 개별 제작극장들은 자체 프로그램과 이웃 제작극장의 여러 프로그램을 올림으로써 연중 쉼 없이 극장을 가동할 수 있다. 국내에서 국공립극장도 하지 못한 방식을 지역 소극장들이 뭉쳐 실천하고 있다는 게 경이롭다. 잘만 하면, 전체 연극계로 확산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협동조합 사업으로 실질적 수입이 발생할지 는 좀 더 두고 봐야 하지만, 지역끼리 동지적으로 서로 연대하면서 느끼는 정신적 충족감은 매우 소중하다.
3월 말 문을 닫은 대학로극장은 충북 단양에서 ‘만종리 대학로극장’으로 재개관했다. 귀농을 통해 농사와 연극을 병행하는 힘든 실험이다. 지난 8월 초 만종리를 찾았을때, 정재진 대표는 “대학로에서 절망을 봤다면, 만종리에서 희망을 봤다”라고 했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 “힘내라”라고 붙이는 구호로 들렸다. 바야흐로 연극계는 곳곳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자구책 마련에 나선 모습이다.문화+서울

글 손준현 한겨레신문 기자
그림 손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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