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어떤 고민도 예술적으로 상담해드리는 ‘예술적 상담소’.
온라인으로 별도 공간을 마련해 고민 상담을 위한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올려주신 고민에 대한 예술적 대책을 찾아 답변을 달아드리니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sfac.or.kr) - 열린광장 혹은 페이스북 탭에서 예술적 상담소를 찾아주세요!
다른 사람의 고민에 댓글을 달 수도 있답니다.
채택된 질문은 [문화+서울]에 게재되며, 소정의 상품을 발송해드립니다.
좋아해서 시작한 춤, 너무 바빠지니 설렘도 열정도 사라졌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춤을 전공하고 있는 21세 학생입니다. 저는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똑같은 것보다는 도전하는 것, 직접 경험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좋아하는 ‘춤’ 때문에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연습도 잦아지고, 레슨도 많아지면서 시간을 쪼개도 겨우 자는 시간만 남게 되었죠. 그렇게 좋아하던 미술관의 그림, 풍경 속 하늘과 나무와는 거리가 멀어졌어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차이는 너무 크더라고요. 똑같이 좋아하는 것인데, 해야 하는 것을 할 때엔 설령 그게 ‘춤’이라고 해도 이제는 설렘이 사라진 것 같아요. 저에 대한 확신도 점점 없어지고 자신감?자존감도 낮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지, 내가 정말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꽉 막힌 상자 같은 생활 속에서 제자리걸음 하는 느낌뿐인걸요. 새로운 것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고요. 물론 춤추는 순간은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다시 무엇이든지 열정적으로 할 때의 ‘나’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바빠요. 바쁜 게 좋다고는 해도 그저 현상유지를 위한 삶이 옳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뾰족한 해답을 바라기보다는, 그냥 답답했던 마음을 적어보는 거예요. 하하, 좀 더 새로운 이야기가 저에게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나그네라도 길 위에서 잠시 쉬어가야 합니다
슬럼프는 딸꾹질 같아요. 언제 찾아왔는지 모르게 불쑥, 평온한 호흡을 방해하죠. 누구도 제대로 멈추는 법을 모른다는 것도 비슷해요. 숨을 참거나, 물을 마시거나, 또 누군가가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겁을 줘야 합니다. 그렇게 원인도 해법도 모른 채 딸꾹질이 멈추는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잊고 살지만 또 언제 요상한 소리를 내며 내 호흡을 흔들며 찾아올지 모릅니다.
너무 빨리 찾아오는 경쟁과 치열함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예술이 꿈꾸는 미래가 아닌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되어 외롭고 힘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는 정답도 아니고 조언도 아닙니다. 단지 같은 고민과 공감을 나누며 서로를 토닥이는,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도 일찌감치 겪었던 일입니다. 첫 학기 수업을 듣고,
첫 번째 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알아버렸죠. 노력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선천적 재능을 타고난 친구에 비해 나 자신의 재능이 너무 모자란다는 사실…. 이미 그 순간에 미래를
눈치채버렸는지 모릅니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타인이 아닌나 자신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예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슬럼프는 훨씬 일찍 찾아옵니다. 이미 너무 빨리 미래가 결정된 아이들은 너무 앞서 친구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예중과 예고를 졸업한 친구들이라면 더 어린 학창시절부터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숭고함이 좌절되는 순간을 맛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여고괴담: 여우계단>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주인공을 가리는 오디션 자리. 늘 자기보다 뛰어난 친구에게 밀려 솔리스트 자리를 놓친 아이가 토슈즈에 깨진 유리를 넣어둡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친구를 다치게 하는 그 아이보다 깨진 유리에 발가락이 찢기면서도 웃으면서 오디션을 마친 주인공의
모습이 조금 더 무서웠던 것 같아요. 감독은 다소 극단적인 그
장면을 통해 내가 꾸는 꿈이 좌절된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어쩌면 입학과 동시에 주연과 조연이 갈리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과 승리, 패배와 좌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하죠.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예술의 미래를 논하는 낭만적 시간을 즐길 여유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소진되고 있다는 기분에 좌절감도 쉽게 찾아옵니다. 흡사 방석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숫자가 줄어드는 방석에 매끈하게 안착하느냐, 잉여가 되어 그어진 선밖으로 밀려나느냐 결정되는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빨리, 그리고 자주 벌어지죠. 훨씬 더 적나라하게 이빨을 드러내는 동료들과 그보다 더 세속적인 교수들 사이에서 드러난
민낯이 보기보다 예쁘지 않아 주춤거리게 됩니다.
다시, 권태에게 길을 묻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A man takes a job, you know and that job becomes what he is(당신도 알다시피, 한 사람의 일은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
되는 거야).” 치열하게 노력하고, 열정을 다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꿈꾸는 예술가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겠지요. 꿈을
꾸게 했던 예술이 어느새 과제가 되고, 미래의 숙제가 되고,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입니다. 이유 없는 좌절과 슬럼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골 깊은 권태가 시작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나그네일지 모릅니다. 어떤 것도 뚜렷하게 결정하지도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르죠. 상투적인 결말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얘기를 하면서 글을 맺을까 합니다. 갑자기 찾아든 딸꾹질을 멎게 하기 위해서 잰 걸음을 멈추고 딱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왜 이 길 위에 서 있는지 생각하고 다음 걸음은 어디를 향해 디뎌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당신은 아마 충분히 성실했고, 앞으로 더 성실할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잠깐 멈춰서 권태와 마주해보죠. 그리고 잊지 말아야겠죠. 나그네라도
길 위에서 잠시 쉬어가야 한다는 것을.
- 답변 최재훈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 매니저.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