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가 된 팔, 혹은 수용되지 못한 감정에 대하여 청소년극 낭독 공연 <나는 거위>
수용되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왠지 ‘어른스러운’ 이 아이, 원하지 않는 생일 선물을 받고도 부모를 위해 기쁜 척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이 아이가, 너무 아파 억압해 버린 고통의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이 극은 엄마라는 애착 대상을 사고당한 것처럼 상실해 버린 이후, 엄마와 연관된 고통의 감정을 자신의 한쪽 팔에 저장해 버린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극 전반에서 엄마 아빠가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중점적으로 변호하지 않는다는 점, 부모의 서사로 인해 아이의 서사가 지워져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청소년극으로서 누구의 목소리를 들려줄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펼쳐내, 이들이 결코 ‘나쁜 부모’가 아님을 대변하거나 힘든 어른들의 감정을 읽고 이해하라는 메시지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이 청소년극으로서 이 연극이 갖는 미덕으로 느껴졌다.
엄마가 사랑에 빠지는 건 나쁜 게 아니지만, 그런데 너무 화가 난다는 아이의 말. 아빠를 싫어하지만, 아빠가 아프길 원치 않는다는 말. (엄마 역할의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거위’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설사 시한부로 만들어 죽이더라도, 거위를 놓아줄 수는 없다며 거위와 자신의 몸을 붕대로 묶는 아이의 절박한 행위 모두 일관되게 아이의 솔직한 감정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뒤로 밀려나 있는 아이의 감정을 맨 앞에 두겠다는 의도와 의지가 일관되게 극을 관통하고 있다. 어른들의 사정이 어떻든, 부모 두 사람이 아이를 고립시킨 채 어떤 합의도 이뤄내지 못하는 동안, 때때로 서로를 공격하고 무서워하는 동안, 이 아이는 집안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아이의 마음을 묻는, 특히 부모의 소통 불능 상황이나 헤어짐에 대해 아이의 의견을 묻는 어른은 없었다. 보호자인 부모의 관계가 한순간 와해되고, 사랑하는 엄마가 자신의 생일에 자신을 떠나고, 친하지 않던 아빠와 단둘이 남게 된다는 사실은,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에게는 버려짐의 사건이다. 삶의 재난과도 같은 사건 이후, 한순간 거위가 돼버린 아이의 팔, 이는 누적돼 온 아이의 불안과 고통의 감정이 만들어낸 것이다. 동시에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엄마라는 대상이, 아이의 몸에 합체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의 팔에서 돋아난 거위는, 엄마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연기한다. 아이는 거위가 된 자신의 팔을 마치 꿈인 듯 바라보는 첫 아침에, 하늘의 기러기 떼를 바라본다. 이 순간, 아이는 거위가 아이의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기러기 떼를 따라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이미 너무 오래 엄마의 고통을 지켜봐 온 아이는, 아직 놓아줄 수 없는 엄마를 이토록 아프게 이해하고 있다.
낭독극이지만 보면대를 두고 앉아서 희곡을 읽는 형태가 아닌, 움직임으로 가득한 공연이었다. 섬세한 지문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부드럽게 결합했다. ‘낭독’이 아주 재미있는 연극적 형식으로 선택된 것처럼 느껴졌다. 낭독극으로서 지문을 읽는 형식을 활용하며, ‘나는’으로 시작되는 아이의 말을 아빠 역할의 배우가 발화한 지점도 흥미로웠다. 이 지점에서 어쩌면 이 무대 위의 인물들과 세계가, 팔이 거위가 돼버린 아이가 해석하고 창조해 내는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도 했다. 무대 위의 연주자가 아이의 서사를 따라가며 연주하고, 거위는 아이가 솔직한 감정을 꺼내도록 유도하는 친구가 된다. 날것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거위에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분별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극의 마지막, 아이는 결국 거위이자 상실한 대상인 엄마와 무대 위에서 대화하면서 마침내 거위와 자신의 몸을 묶은 붕대를 풀기로 선택한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애착과 화를 표현한 이후에 마침내 거위를 떠나보낸다. 엄마가 고유한 욕망을 지닌 ‘완전한 타자’임을, 오랜 슬픔의 시간 끝에 수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로써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억압돼 거위가 돼버린 자신의 부정적 감정에서도 분리된다. 슬픈 아이는, 회복하기 위해 어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애도 의식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작품의 끝에서, 거위를 날려 보내는 아이는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팔’을 되찾으며 회복한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팔이 거위로 변하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거위와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용인하고,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안아준다면. 혹 우리가 누군가의 거위를 목격한다 해도, 판단하고 혐오하지 않는다면. 거위는 제 역할을 마친 뒤 떠나갈 것이다. 말하지 못한 슬픔에는 언제나 친구가 필요하다. 회복하는 마음에도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위를 끌어안을 때, 거위는 나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거위는 내가 아니다.
글 장영 극단 프로젝트 414 연출부, 독립연극 잡지 《이화연극》의 필진으로 활동했다. 2018년 국립극단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 희곡 공에서 《G의 영역》이 당선돼 작가로 데뷔했다. | 사진 제공 어느날 예술하기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