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나쁜 일은 아니었다
직업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노력 끝에 성취한 것이든 우연히 몸담게 됐든 자기 일을 반복하는 사람에겐 그것의 성질이 몸 어디에 박인다. 직업에 만족하면 만족하는 대로 만족하지 못하면 또 그런대로, 일은 사람을 차지하고 시간을 가로챈다. 오랜 시간 하나에 집중해 온 사람은 그 일과 자신을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통해서 그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인생을 그린다.
웹진 [비유] 50호의 <쓰다>에 실린 김지연의 소설 <도둑>의 주인공 판조는 허리디스크를 앓는 중년 남성이다. 장성해 중국으로 출장을 떠난 딸이 있으며 아내와 자신은 용돈벌이 없이 살 수 있을 만한 경제력도 지닌 듯하다. 흥미로운 건 그가 가족은 물론 자신조차 곤란하게 할 만큼 물건 버리는 일에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웹진 [비유] 50호 포스터
오랫동안 판조가 손댈 수 없었던 곳이라 버릴 것 천지였다. 아직 애들 취향을 못 벗어난 것 같은 장난감 장식품들, 사은품으로 받았다는 자질구레한 정체불명의 것들, 집 안에서도 뒤집어쓰고 다니던 검정 후드티, 판조의 기준에서 쓸데없는 것들, 무용한 것들, 못마땅했던 것들을 모조리 봉지에 넣었다. (중략) 결국 판조는 쓸모없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 쓸모있는 것들도 몇 개 쓰레기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그냥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은 다 봉투에 담았다.
김지연 <도둑> 중
집에는 일이 없다. 판조가 정년을 채우며 바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집 안의 모든 일은 아내 순임의 것이었다. 집안일이 끊일 리 없는데도 거기엔 그의 몫도 책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리를 하거나 화초를 가꾸는 일에 판조가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봤자, 요령이 월등한 순임에게 한 소리 듣고 곧 물러나야 할 게 불 보듯이 뻔하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게 청소, 즉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힘과 시간을 쏟으면 되는 일이 청소다. 게다가 물건을 치우고 버리기 시작하면 청소의 성과는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에게 청소란 오랫동안 자기 존재를 증명해 주던 직장을 떠난 후에 새로 찾은, 자기 몸과 생각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어주는 구실이었을지 모른다.남의 물건을 멋대로 판단하고 버리는 그의 태도는 종종 폭력적이다. 하지만 정년 퇴임한, “6번과 7번 사이의 디스크가 비죽 나온”, 딸의 방에서 영원히 퇴장당한 판조의 “울고 싶”은 마음에 측은함을 느끼는 독자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 골목이나 싸다니다가 어느 집 앞에 누가 버리려고 내다 놓은 책상과 의자를 봤을 때 당장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일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스티커 붙일게요.’ 하고 쓴 종이가 붙어 있는 걸 봤을 때는 누가 남이 쓰다가 버린 걸 가져가겠냐고 생각한 정도였다. 하지만 애초에 목적지가 없어 아무렇게나 걷다 보니 다시금 그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고 그때는 책상이 꽤 쓸 만해 보였다.
김지연 <도둑> 중
병원 가는 길에 만난 낡은 책걸상을 결국 집으로 가져온 판조에게 순임은 역정을 낸다. “살면서 뭐가 필요하고 뭐가 불필요한지, 뭐가 귀하고 뭐가 쓸데없는지 서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남에게 필요한 물건을 쓸모없다 생각하고 마음대로 버리던 판조가 그 누구도 쓸모를 찾지 못한 낡은 물건을 기어이 집으로 가지고 오는 장면은 기묘하고 역설적이다.
책상은 죽은 사람이 쓰던 것이었다. “그 책상을 쓰는 동안에는 그 사람은 살아 있었다. 그 관계 속에서 한쪽이 사라지자마자 책상도 쓰레기가 되었다. 그게 아주 나쁜 일은 아니었다.” 판조는 생각한다. 쓰레기가 됐기에 책상은 판조의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정년 퇴임으로 한쪽에서 쓸모를 마친 판조의 현재 역시, ‘아주 나쁜 일은 아니었다’ 는 긍정적 수용에 이를 날이 멀지만은 않아 보인다.
글 김잔디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