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조 감독의 <갈매기> 당신이라는 깃발을 보았습니다
운동회가 열리면 운동장에 만국기가 걸렸다. 하늘을 가릴 만큼 빼곡하게 걸린 깃발들이 펄럭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락팔락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사실 아무도 깃발 하나하나를 관심 있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깃발이란 원래 펄럭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저러다 말겠지. 바람이 그치면 축 늘어지겠지. 그냥 그런 거라고, 그냥 저러다 마는 거라고. 하지만 아랑곳없이 유난히 혼자, 바람이 불건 말건 더 팔딱팔딱, ‘나’를 좀 봐달라고, ‘나’는 살아 있다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고, 외치듯 흔들리는 깃발도 있던 것 같다.
‘나’ 라는 인권을 위해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오복(정애화)의 큰딸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눈치 없는 남편과 철없는 막내딸은 그녀에게 늘 걱정을 안겨준다. 그러다 시장 상인회에서 술을 먹은 날, 험한 일이 벌어졌다. 오복은 상처받고 싸우려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녀 편에 서서 도와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말한다.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간 거라고, 젊은 사람 발목 잡지 말고 가만 있으라고. 하지만 오복은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 가만있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김미조 감독의 <갈매기>는 60대 여성의 성폭행 사건 이후를 그리는 영화다. 상당히 논쟁적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감독과 배우 모두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누구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누구도 주인공보다 앞서 화를 내거나, 동정하거나 포악질하는 법이 없다. 김미조 감독은 주인공이 극악한 상황에 처한 ‘사건’을 앞서 바라보지 않고, 사건의 파도에 휩쓸린 그 ‘사람’을 먼저 살핀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 어쩌면 집안의 실질적 가장으로서 역할을 놓을 수 없는 오복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봐 망설이는 사람들의 이기심도, 함께 맞서 격렬하게 싸워주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의 현재도 오복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평생 ‘내’ 목소리 한번 내본 적이 없는 한 중년 여성이 드디어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려는 순간, 그 무기력함과 망설임도 묵묵히 인정하면서 결국 ‘나’ 라는 인권을 발견하는 순간을 응원한다.
‘나’ 라는 존엄을 위해
<갈매기>는 플래시백 없이 오직 오복의 현재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이, 그날의 기억이, 오복을 상대했던 사람들이, 그것에 대응하는 오복의 자존감이 현재의 오복을 만들었다는 것을 굳이 힘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힘주지 않은 연출이 오복의 변화만은 꾹꾹 눌러 쓴다. 그래서 오복의 인생 페이지의 뒷장에도, 관객들의 마음에도 짙은 자국이 남는다.
힘센 두 날개를 가졌지만, 계속 뭍에서 어슬렁거리는 갈매기처럼 오복은 자신만의 이름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었다. 엄마이자 아내로 살아왔더니 여성으로서의 오복은 지워지고 없다. 그리고 비로소 여성, 그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딸에게 그날 일을 털어놓은 후, 용기 내 찾아간 경찰서 문은 그날따라 이유 없이 잠겨 있다. 오복이 맞아야 할 세상을 상징하는 장면 같다. 누군가는 선의를 가지고 오복을 도와주길 바라지만 ‘선의’라는 명사에 따르는 동사는 ‘베풀다’ 이다. 베풀다가 내포하는 것이 희생·포기·관용·용기라는 점에서 타인에게 선의를 요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복은 이제 ‘나’를 위한 선의를 베풀 사람은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세상도 사람도 가족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오복은 바뀌었다. 누군가가 봐줄 때까지, ‘내’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펄럭이기로 결정한 순간, 오복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결말이 너무나 단호해서, 그 깃발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갈매기>(2021)
감독 김미조
출연 정애화(오복 역), 이장유(무일 역), 고서희(인애 역), 김가빈(지애 역)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사진 제공 (주)영화사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