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37호 포스터
어느 여름 새벽 쉽게 잠들기가 어려웠던 나는 전자책으로 《체공녀 강주룡》을 읽기 시작했다. 새벽이 금세 지나고 단단한 아침이 밝았으며 강주룡과 함께 달라진 내가 전자책을 내려놓았다. 책을 읽고 흥분한 마음에 아침잠도 낮잠도 잊었다. 기분이 좋아서 다른 더 훌륭한 책을 읽고 싶을 뿐이었다. 《체공녀 강주룡》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책에서 찾는 의미가 독자마다 다르겠으나, 나에게는 강한 여자가 사랑받는 이야기였고 강해서 사랑받아 마땅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혔다.
작가 박서련의 신작이라면 이제 모든 일을 덮어두고 읽는다. 그의 두 번째 단행본 《마르타의 일》은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언니 이야기다. 언니를 돕는 건 역시 또 다른 언니. 그리고 2020년 여름 그의 세 번째 단행본 《더 셜리 클럽》이 출간됐다. ‘셜리 클럽’은 ‘셜리’라는 이름을 똑같이 가진 할머니들의 모임이다. 이 장편소설은 집단의 유일한 젊은이 ‘설희’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주인공 설희의 연애를 옆에서 돕는 개성 넘치는 ‘셜리’들의 우정을 다룬다. 여성이 여성을 돕는 일이 얼마나 섬세하고 근사한 것인지 감탄하게 하는 책이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장르의 경계마저 허무는 박서련의 소설은 매번 우리를 매혹하며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그의 모든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여성이 지닌 어떤 강인함에 초점을 맞춘다.
2021년 웹진 [비유] 신년호에 박서련의 소설 <거의 영원에 가까운 장국영의 전성시대>가 실렸다. 나로선 제목만 보곤 그 어떤 내용도 추측할 수 없었다. 이 단편의 장르는 SF이고, 주인공은 물론 여성이다.
맹순영은 배우다. 아직까지 주연을 맡은 적은 없지만 주연이었던 적이 없다고 해서 배우가 아닐 리 없다. 주연은커녕 배우로서 스크린에 노출된 시간을 초당 밥알 한 알로 환산할 때 맹순영의 출연 시간은 아무리 끌어모아도 밥 한술이 될까 말까 하지만 그래도 맹순영은 배우다. 이 사실은 영원히 또한 매 순간 맹순영의 자존과 자조의 양가적인 근거가 된다.
박서련 <거의 영원에 가까운 장국영의 전성시대> 부분
이야기는 단역배우 맹순영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우리는 단역배우의 삶이 어떠한 그늘을 거느리는지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에서도 어느 정도는 드러나는바, 그들은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묵묵히 자기라는 존재를 주장하고 있으며, 그만큼의 위치라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경제적·심리적 어려움을 감내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단역배우의 일상은 우리 주변의, 특히 젊은 여성들의 그것과 별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 멋지고 화려한 주인공이 스쳐 지나는 한낱 ‘배경’으로서, 고작 육교 건너는 역할을 맡은 단역배우 맹순영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하기만 하다.
어느 추운 밤, 그는 자취방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다 캐스팅 제안을 받는다. 미래에서 온 캐스팅디렉터에게, 그것도 장국영의 상대역으로 말이다. 그 디렉터는 강조한다. 맹순영이야말로 장국영의 상대역으로 ‘역사상 가장’ 어울리는 배우라고. 이 상황은 맹순영의 단순한 꿈이나 망상일 뿐일까?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맹순영 씨야말로 장국영 씨의 상대역에 사상 가장 적합한 배우로 지명되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서는 말이죠.”
“사상 가장 적합하다고요?”
“그렇습니다.”
맹순영은 깔깔 웃는다. 마침내 공포와 경악이 완전히 지워진 얼굴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죽은 사람들하고도 비교를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출발한 시대 기준으로는 맹순영 씨도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맹순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진다.
박서련 <거의 영원에 가까운 장국영의 전성시대> 부분
때로는 사소한 가능성이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는 것, 간절한 일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때로 우리는 손에서 놓기 어려운 작은 희망만 가지고 엄청난 힘을 내기도 하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능성으로 자기 내면의 힘을 북돋아, 눈에 보이는 자신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맹순영이 앞으로 어떤 배우로 살아가게 될지는 맹순영 자신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미래를 알 수 없듯 말이다. 하지만 맹순영은 미래에서 온 캐스팅디렉터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향해 자기를 더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는 배우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발휘한 힘을 보면서 독자인 나 또한 다시 한번 힘을 낸다.
- 글 김잔디_웹진 [비유] 편집자
사진 제공 웹진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