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치라이트 미래도시: 입정동편 <플랫폼SW3-123>’
서치라이트 미래도시: 입정동편 <플랫폼 SW3-123> 공연이 진행되는 모습
오랜만에 찾은 세운상가는 재개발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재개발이라는 문제를 두고 서울시와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이곳에서 3개월 동안 지역을 경험한 기획자들이 ‘세운개장’ 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전시·탐험·연극·게임·워크숍 등 총 8개의 프로그램이 준비됐는데, 그중 하나인 ‘서치라이트 미래도시: 입정동편 <플랫폼SW3-123>’ 은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된, 수정다방과 입정동 일대를 배경으로 한 이동형 연극이다.
제작진은 공연 전에 예매 관객을 대상으로 안전수칙을 개별 문자로 꼼꼼하게 전달했고, 현장에는 살균 스프레이와 손 소독제를 비치해 두었다. 더불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관객의 체온을 확인하고 개인정보도 수집했다. 최대한 안전수칙을 반영해 공연이 진행됐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세운상가를 거쳐간 ‘사람들’의 이야기
<플랫폼SW3-123>의 이야기는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진 미래의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발전시켜 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식민지행성 SW3-123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시간의 균열로 SW3-123으로 가는 열차의 선로가 끊기고, 시간의 선로를 고치기 위해서는 부품이 필요한 상황이다. 기장과 AI인 ‘타라’의 안내에 따라 열차의 승객이 된 관객들은 입정동 일대를 걸으며 부품을 찾아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세운상가에 살았던 과거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복을 입고,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성매매 여성, 성인비디오를 몰래 파는 상인, 공터에서 허름하게 생활하고 있는 기술자 장인, 그리고 귀머거리 아이. 극단 52Hz은 195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세운상가를 거쳐 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상상해내 현재로 소환했다.
세운상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다. 미군 폭격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터로 비워놓은 곳에 무질서한 판자촌이 형성되고, 그곳은 전쟁 이후 생계 수단으로 성매매를 하던 여성들이 모이면서 거대한 성매매 집결지가 됐다. 1966년 세운상가의 착공이 시작됐고, 2년에 걸쳐 완공에 이른다. 그러나 애초에 기획된 유기적인 건물 연결이 불가능해지면서 반쪽짜리 공사에 그치고 만다. 기술자, 유통업자 등 다양한 산업군이 유입되며 한때 경제 호황을 누리지만, 서울 시내의 개발과 업체들의 이전이 계속되면서 점점 낙후되고 만다. 2020년 현재, 서울시가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전면 철거와 재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가공의 인물은 귀머거리 아이인데, 이 아이는 판자촌에서 성매매를 하던 여성의 아이와 동일 인물이다. 아이는 미래의 인류를 만나 이름을 갖게 되지만, 잿더미에서 엄마와 함께 죽은 채로 발견된다. 모녀의 시신을 발견한 기술자 장인이 자신의 죽은 딸을 떠올리며 아이를 AI로 재탄생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기술 도면을 이식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기억을 가장 소중한 곳에’ 심어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귀머거리 아이의 설득을 통해 기술자 장인은 단절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부품을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연극은 끝을 맺는다. 귀머거리 아이는 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안내자 역할을 해주면서, 시간을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공간과 그 안의 삶을 통해 기억하기
극단 52Hz는 인터뷰에서 “사라지는 공간에서 살아간 개개의 삶을 유의미하게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연극은 관객을 극의 내부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공간의 역사를 탐구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배우들의 충실한 연기와 소소한 장치, 그리고 역사 그 자체인 공간이 어우러지면서 완성도를 높였다. 공연이 끝난 마지막 장소에 세운상가 장인의 인터뷰를 녹음한 테이프와 카세트플레이어를 비치해 관객들이 직접 음성 자료를 들을 수 있게 했고, 관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여분의 테이프도 마련해 놓았다. 또한 세운상가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이벤트도 사전에 공지해 관객을 자연스럽게 공간으로 스며들도록 했다. 섬세한 배려와 공간에 대한 애정을 알 수 있는 작업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헤아릴 시간도 없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뿐이다. 그림자는 기억을 말할 수도 보여줄 수도 없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잠시 드러내고 다시 또 다른 어둠을 쫓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건설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잃어가는 기억의 박물관이 아닐까. 기억을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시공을 넘나들 수 있다. 시공을 잇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기록이 될 것이다. 서치라이트 미래도시: 입정동편 <플랫폼SW3-123>은 기억의 박물관이자, 미래에 우리들이 먼저 읽게 된 편지이기도 하다.
- 글 박상미_주로 예술기획, 예술행정, 예술에 대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올해는 현대연희극 공연 기획과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축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papermoonfly@naver.com
사진 제공 극단 52H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