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지구 골목길.
2019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 서울역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한동안 붙박여 있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기미들에 침잠하면서 그것이 알려주는 의미들을 감각했다. 쓰라리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낯이 뜨거워지거나 왈칵 쏟아내야 할 서러움의 솟구침, 이런 느낌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시간이었다. 서울역은 아직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일제강점기의 유물 그대로다. 건물 앞쪽의 모퉁이엔 구두를 닦는 청년들이 있었고 신문더미를 옆구리에 끼고 그날의 주요한 사건이 실렸다고 소리치는 소년들이 느리게, 혹은 바삐 걸어갔다. 누런 종이봉투에 가짜 서류를 담아 들고 더러 실밥이 흘러내린 낡은 양복을 입은 점잖은 신사. 급하게 직원을 구하러 나온 듯 보이려는 그 얼굴엔 자상함과 비열함이 네온처럼 들고나도 추레함은 감춰지지 않았던 아저씨들. 등에 둘러업은 아이의 머리가 부러질 듯 포대기 밖으로 빠져나온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잡고 악착같이 ‘쉬어가길’ 강권하는 젊은 여자들.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방금 기차에서 내린 농촌 사람들의 꿈을 ‘돈벌이’로 만들려는 인신매매의 달인들은 아주 흔했다. 남자들은 쉬어가고 소녀들은 팔려갈 곳은 바로 길 건너편 언덕배기에 ‘양동’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곳에서 하루하루 뜨내기로 사는 소년이나 소녀, 청년들은 그 당시의 나처럼 ‘전쟁이나 나지!’, ‘이 나라는 언제 팍 망하나!’ 하고 자폐와 자폭의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매매춘과 인신매매의 현장인 이곳 근처엔 경찰서도 있었고 마음대로 빨갱이를 만드는 무서운 곳도 있었으며 그곳에서 가까운 곳엔 미군부대와 국방부도 있었지만 새벽시장처럼 붐비고 쓰레기더미처럼 지저분한 이곳은 성욕이 남성 중심으로 이해되던 시대의 ‘자연’이었다. 나는 소설가랍시고 이곳을 넘보면서 밑도 끝도 없는 ‘사회불만분자’가 되어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회 불만도 힘이 있어서 가능했다. 누굴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사회나 세상을 증오하는 것도 다 힘이 드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젠 힘이 없어 그런 감정을 잠시도 마음에 들이지 못해 저절로 선량하고 무던해졌다.
양동은 그사이 여러 번 재개발되었다. 대우빌딩은 물론 그 뒤의 하늘을 찌르는 오만한 인상의 빌딩들, 그리고 밀레니엄 힐튼 호텔. 거의 다 낯 뜨거운 추억의 ‘양동’ 땅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그런 곳들을 걸어서 남대문시장이 건너다보이는 곳으로 왔다. 힐튼에서 굽어진 찻길을 건너면 낡고 초췌한 건물들이 보였다. ‘개발’에도 살아남아 시간과 세월을 간직한 집들. 아주 가파른 시멘트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딱히 바람직한 비유는 아니지만,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에서 양동지구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1980년대 이곳에는 시각장애인들과 하루벌이 노동자들이 살았고 매매춘 여성들도 살았다. 이곳으로 나를 데려간 사람은 소설가 P였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의 동지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남주 시인의 옥바라지를 하던 그. 그와 함께 처음 그곳의 어느 판잣집으로 들어설 때, 아마 어렵게 겨우 기어 올라갔던 것 같다. 집 주인의 첫인상은 아름다움 자체였다. 얼굴에 푸근함, 자태엔 부드러움, 목소리는 아늑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부부의 아이들과 양동의 매매춘 여성들의 어린 자식들을 돌보고 있었다. 시각장애인 부부가 일을 하러 나가면 어린 아이들은 홀로 남겨지고 그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가르쳤다. 무슨 단속에 걸려 하루나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아이들만 남은 매매춘 여성의 어린 자녀들. 그가 데려와 ‘엄마’ 노릇을 하는 그의 집. 나는 그를 ‘천사’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런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이름만 ‘갑’이니 ‘특권’이니 하는 신분과 계급으로 나뉜 사람살이는 여전하다. 시각장애인 부부는 아이를 돌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부부들은 아이가 왜 우는지 몰라요. 아이는 가지고 놀던 공이 장롱 밑바닥으로 굴러들어가서 그걸 꺼내달라고 우는데, 안 보이니까 모르는 거죠. 매매춘 여성이 어머니일 경우 단속에 걸리면 하루 이틀은 물론 며칠이고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무턱대고 아이들만 있는 거죠. 젖먹이에서 서너 살까지. 어떻게 살아남을지 몰라요…….”그래서 천사는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아직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는 젖병에 우유를 담아 품에 안고서 먹였다. 나는 천사를 만나러 자주 그곳에 갔다. 현재의 양동 4, 5지구. 나의 현실은 천사의 현실과 달랐고 그렇게 살 수는 없었지만 사회적 편견과 신분적 ‘경멸’에 분노와 의문을 던질 수는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부자들의 삶과 부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미신(迷信)을 퍼뜨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의 생활이 서로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라면, 그래서 계급 간에 적대감이 생기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면, 물정 모르는 감상(感傷)일까?
그 가파른 지형의 쪽방촌.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집들. 더러 층수를 높이고 치장을 잘한 건물도 있지만 여전히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낡고 닳고 삭은 집들 앞에서 그리움에 먹먹해졌다. 세를 놓겠다, 달세도 받는다는 종이가 붙은 집. 하숙도 가능하다는 쪽지. 광고지와 고지서들이 삐져나오게 꽂힌 우편함. 누렇게 마르고 색이 바랜 꽃들의 화분이 놓인 집. 집. 집.
내가 어떤 이유로 그 천사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내게 보여줬던 무언(無言)의 해방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 편견 없이 산다는 것. 공생을 실천하는 삶에 대한 아득한 느낌까지.
그래서 거의 반세기가 흐른 지금 나는…… 명예와 권력과 돈의 힘에 곁눈질하면서도 자유를 느끼거나 말할 수 있을까?
-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