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동의 무한한 문화 잠재력
자, 마음속으로 드론을 한 대 띄워보자. 여기는 상암동이다. 저기 웅장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이 보인다. 그 앞으로 월드컵공원과 평화의공원이 있고, 한강 쪽으로 더 가면 난지한강공원(난지캠핑장)이 나타난다.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틀면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자리 잡고 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난지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큰 길을 건너면 이번에 새로 구축된 문화비축기지가 나온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상암DMC의 방송사들이 당당히 버티고 있다.
서울에 이만큼 문화적 잠재력이 큰 곳이 또 있을까? 상암동에는 대충 나누어도 7개의 문화블록이 있다. 하나하나가 굵직하다. 월드컵경기장(서울프린지페스티벌), 월드컵공원과 평화의공원, 하늘공원과 노을공원(노을캠핑장), 난지천공원(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한강공원(난지캠핑장), 문화비축기지(문화로놀이짱), 상암DMC(MBC, JTBC, tvN, YTN, TBS)가 바로 그곳이다.
상암동에 위치한 7개의 문화블록은 각자의 장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예술의 장소성’을 가장 잘 구현한 행사로 꼽히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매년 여름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고, 문화비축기지 앞마당 컨테이너 건물에는 문화로놀이짱을 지휘자로 해 여러 사회적기업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상암DMC는 여의도를 잇는 우리나라 방송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다.
이곳은 자연환경도 탁월하다. 월드컵공원과 평화의공원 그리고 난지한강공원과 난지천공원을 따라 달리면 마라톤 단축 코스를 뛰는 정도의 거리가 나올 정도로 광활하다.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공원으로 꼽히는 하늘공원에서는 억새밭을 걸을 수 있다. 정서 방향으로 흐르는 한강 위로 석양을 볼 수 있는 노을공원은 캠핑족들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런 우월한 환경 속에서는 그 안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빛난다. 최근 문화비축기지에서 펼쳐진 <서커스 캬바레> 무대를 보고 왔다. 문화비축기지는 석유비축기지의 기름 탱크를 복합 문화시설로 바꾼 곳으로 상암동 문화블록의 루키로 꼽힌다. <서커스 캬바레> 역시 서울프린지페스티벌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장소성’을 살린 공연이었다. 마당의 넓은 무대는 접근성이 좋았고 탱크를 활용한 무대는 숲속에 고립되어 있어 공연에 집중하게 했다. 시설을 리노베이션할 때 장소의 역사성을 살리고 군더더기 없이 미니멀하게 통일해 어떤 행사나 공연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게 했다.
1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본 풍경. 월드컵경기장과 주변 공원이 보인다.
2 난지캠핑장.
3 하늘공원.
4 공중에서 본 문화비축기지.
5 문화비축기지에서 펼쳐진 <서커스 캬바레>.
문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기대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7개의 구슬이 같은 주머니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서커스 캬바레>가 열릴 때 월드컵경기장에서는 한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가 열려 묘한 대비를 이뤘다. 그들의 우주와 이 우주가 다르고 거대한 고깃집이 된 난지캠핑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캠핑족의 우주가 다르고 하늘공원에서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청춘들의 우주가 또 달랐다.
물론 그 우주가 같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나머지 우주가 너무 안 보이는 것은 좀 아쉬움이 있다. 자신의 구슬을 찾아 상암동에 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6개의 구슬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면 그들의 우주는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연결된 터널이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 터널을 지나 다른 우주를 탐험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암동 문화시설의 특징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고립’이다. 하나하나가 기막힌 역할을 하는 곳인데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그렇고 문화로놀이짱이 그렇고 매년 한여름에 악전고투하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그렇다. ‘기막힌 고립’이다. 그들의 작업을 시민들이 본다면 분명 호응이 클 텐데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시민들을 그곳으로 이끌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암동의 문화적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이곳에 문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두면 어떨까. 그 지휘자로 처음 떠오른 곳은 바로 서울문화재단이다. 이미 대학로 이전이 확정되었지만, 상암동에서도 역할이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대학로가 보름달이라면 상암동은 초승달이다. 변화한 대중이 원하는 문화적 세련미를 구현해주면서 다양한 실험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곳으로 서울문화재단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상암동의 7개의 구슬을 모아주는 역할을 서울문화재단에 기대해본다. 서울문화재단이 허브가 되어 그곳의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하게 된다면 절묘한 융합예술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 문화비축기지와 <서커스 캬바레>처럼 플랫폼과 콘텐츠의 멋진 조합을 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보았다.
- 고재열 시사IN 편집기획팀장
- 사진 제공 한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