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음악을 발굴해낸 천재들
바흐가 활동하던 18세기 전반기에는 음악작품을 보존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바흐의 악보가 상점의 포장지로 사용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바흐의 여러 종교 칸타타와 기악곡들은 특정 행사를 위해 소비된 후 그저 버려졌다.
바흐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바흐의 무반주 바이 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역시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철저한 무관심 속에 잊혔다. 1814년에 발견된 바흐의 자필 악보는 한 버터 상점에서 포장지로 쓰는 낡은 종이뭉치 틈에 끼어 있었으니, 이 곡을 자주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의 노력이 없었다면이 곡은 역사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독일의 유서 깊은 악단,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던 페르디난트 다비트는 바흐의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반주 없이 오로지 바이올린 독주만으로 연주하는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 6곡의 독창성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바흐의 악보를 철저히 연구했다.바흐가 쓴 악보에 손가락 번호를 적고, 활 표시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839년 바흐 악보의 편집을 마친 다비트는 이 악보를 출판한 후 가는 곳마다 연주하며 온 세상에 바흐의 음악을 알렸다.때마침 다비트가 일하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였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이 작품에 관심을 보이고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중 ‘샤콘느’에 피아노 반주를 붙였다. 두 음악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로 바흐의 ‘샤콘느’를 즐겨 연주했다.
멘델스존 역시 바흐의 주요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힘썼다.1829년 3월 11일 베를린에서 20세의 청년 멘델스존이 바흐의 대작 <마태 수난곡>을 지휘한 사건은 큰 주목을 받았다. 바흐의 서 거 이후 단 한 번도 연주되지 못한 채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악보가 다시금 빛을 발하자 바흐의 장대한 악상이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오늘날 기독교의 수난 기간 중에 바흐의 <마태 수 난곡>은 거의 예외 없이 연주된다.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연주를 계기로 바흐의 음악이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19세기에 부쩍 자주 연주되기 시작했다. 1833년에는 바흐의 <요한 수난곡>이 재연되었고 1835년에는 미사 B단조가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바흐는 여러 음악가들의 노력 덕분에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위대한 음악가로 거듭났다.
슈베르트의 진가를 발견한 슈만
멘델스존의 친구이자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 슈만 역시 훌륭한 작품들을 알리는 데 힘썼다. 슈만이 슈베르트의 교향곡 C장조를 발견하고 널리 알리지 않았다면, 슈베르트는 그토록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1839년 1월, 로베르트 슈만은 페르디난트 슈베르트가 건네준 악보뭉치를 보며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에 발표된 적이 없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유작 악보 하나하나는 모두가 보물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는 단연 뛰어났다. 슈만은 이 놀라운 교향곡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하고는 그의 친구인 펠릭스 멘델스존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1839년 3월 21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C 장조 <그레이트>가 초연되었을 때 슈만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에 대해 이렇게 썼다.“처음 이 곡을 들으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너무도 화려하게 교차되어 신기한 것을 볼 때와 같은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마술사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이처럼 천재를 알아본 천재들 덕분에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올봄에는 음악의 거장이 남긴 명곡에 귀를 기울이며 이 곡을 알아본 천재들에게 감사를 느끼는 시간을 가져보자.
- 글 최은규 서울대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연합뉴스 등 여러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전당, 부천필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 그림 정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