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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F SEOUL

12월호

장충동 문화주택 그곳엔 문화가 있었을까?
서울의 문화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문화를 담는 주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충동 일대에는 1930년대와 1950년대의 문화를 간직한 주택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연상케 하는 마당이 깊은 그 시절의 문화주택들은 오래된 도시의 ‘문화’를 안고서 잊혀가는 시간의 기억을 전해준다.

햇빛이 따뜻한 언덕 위에 하얀 집에 외로운 내 마음이 잠들고 싶어요.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래주는 하얀 집 저 멀리서 불러요 손짓하고 있어요. 고독한 나그네에 쉬어가는 하얀 집에 파란 꿈을 담아서 살고 싶어요.
- 정훈희 <하얀 집>(원곡 Casa Bianca)

건축과에 입학했을 무렵 우스꽝스럽게 외치던 우리 학과의 구호에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가수 정훈희가 부른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고, 1960년대 TV 연속극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언덕 위의 하얀 집’이 표상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면 떠오르는 집이 있는가? 밝은 햇살이 비치는 푸른 초원 위의 하얀 집. 그 자체로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즐거운 나의 집>을 부르게 될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그런 집. 정훈희의 노래가사에서처럼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많은 이들에게 따뜻하고 그리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집인 동시에 어쩌면 가고 싶지만 저 멀리에 있는 그런 다다를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2, 3 장충동2가 189번지 일대의 1930년대 건축된 남산장전고대 문화주택들.

남산장전고대, 1930년대 경성 엘리트들의 문화촌

최근 서울 지역을 답사하다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을 몇 채 발견했다. 이 집들이 위치한 지역의 옛 이름은 남산장전고대(南山莊前高臺). 단어 뜻 그대로 ‘남산장 앞 높은 지대’라는 의미로, 동대입구역 1번 출구에서 언덕을 따라 오르면 나오는 장충동2가 189번지 일대이다. ‘남산장’은 파라다이스 빌딩 주차장 일대에 있던 요리점이었는데, 이 요리점 앞에 주택들이 세워진 시기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인구의 증가로 주택 부족 문제를 겪던 경성부는 기존의 경성을 크게 확장하여 ‘대경성’을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남산주회로를 만들고 장충동, 신당동 등의 서울 동부지역을 주거지로 개발했다.
1930년 11월 20일자 <경성일보> 기사에 따르면, 남산장전고대에는 대학의 선생, 의사, 고위 공무원 등 지식인 계층이 거주하여 인근 소화원(장충동1가 38번지 일대)과 함께 ‘학자촌’으로 불렸다고 한다. 장충단로 건너편 장충동1가 100번지 인근 구감천정(舊甘泉亭) 문화주택지만큼 으리으리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오순도순 모여 있는 이곳의 집들도 당시로서는 꽤 비싼 가격이었는데, 현재는 다 사라지고 5채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집들은 대부분 목조로 지어졌으며, 외벽은 시멘트몰탈로 마감되어 있고, 지붕은 경사지붕이다. 지붕 아래에는 환기를 위한 둥글거나 기다란 환기창이 있으며, 외부로 돌출된 커다란 2층 창호가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 이런 주택들은 ‘문화주택’이라 불렸으며,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인들 중에서도 상류층이나 지식인 계층에서는 문화주택에 사는 이들이 꽤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들 중에서도 하류층은 문화주택에 살 수 없었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4, 5 1950년대 후반에 지어진 문화주택들. 현재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 중이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문화주택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는 단어는 1920년대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었다. 문화주택은 도시 중산층을 위한 주택으로, 좌식이 아닌 입식 생활, 접객공간이 아닌 가족공간에 중요성을 두는 공간 구성, 화장실이나 부엌 등의 위생설비 구비 등의 성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 문화주택을 어디에 건설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에는 ‘남향의 높은 곳’이 공통적으로 등장했다. 남향의 높은 곳은 햇빛을 받기에 유리하고, 또 저지대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도 있기에 건강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즉 ‘언덕 위의 하얀 집’은 햇빛을 받기 좋기 때문에 살균 효과도 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문화주택지로 남산의 남쪽 언덕과 같은 장소가 선호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화주택은 비단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주택들만 일컫는 말은 아니었다. 1950~60년대에도 우리는 자주 ‘문화주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연와조의 경사지붕을 가진 2층 주택이 주를 이루는 1950~60년대의 문화주택은 역시나 서양식 생활을 지향하는 도시 중산층의 주택을 의미했다. 외부는 시멘트몰탈 대신 치장벽돌이나 연석 같은 석재로 마감하고, 채광창과 환기창이 크게 나 있으며, 1층과 2층을 잇는 내부 계단실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주택들이 다수 지어졌다. 동호로를 따라 조금 북쪽으로 가면, 장충동1가 33번지 인근에 1950년대에 지어진 문화주택들이 몇 채 남아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글·사진 이연경_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건축역사이론 전공으로 석·박사를 취득했다. 한성부 내의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박사논문으로 제6회 심원건축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도코모모, 도시사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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