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전화교환원.
2016년 5월 말 기준으로 서울시에 등록된 버스 노선은 352개이고, 운행 버스는 3749대라고 합니다. 버스안내원이라는 직업이 계속 이어졌다면 8000명 정도의 안내원이 활약하고 있었을 겁니다. 예전에는 수도가 공급되지 않던 높은 지대에 생활용수를 물통에 담아 배달하는 물장수도 있었습니다. 또 대부분의 집에서 아궁이를 사용하던 때는 굴뚝을 청소해주는 직업도 있었고, 컴퓨터로 대형 실사 출력을 하기 전까지는 극장 간판을 손으로 직접 그렸습니다. 손수레를 끌고 ‘찰칵찰칵’ 가위질 소리를 내며 동네를 돌아다니던 고물상은 이제는 보기 드문 ‘추억의 직업’이 됐고, 얼음장수, 식자공, 연탄배달원 등도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기다림이 더 애틋했던 시절
<사진 1>은 자석식 전화기를 사용하던 1950년대에 활동하던 전화 교환원의 모습입니다. 자동교환식 전화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교환국에 전화를 하면 교환원이 원하는 곳에 연결해야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교환기도 계속 바뀌었는데 사진 속 교환기는 교환원이 다이얼을 돌려 상대방과 연결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교환원이 다이얼을 돌리거나 전화선을 꼽아줘야 했기 때문에 통화
인원이 많이 몰릴 때는 오랜 시간 대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유학 온 학생이 시골집 부모님과 통화하려면 한 시간씩 기다리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했겠지만 그 시간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겁니다.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전 세계 어디로든 문자를 보내고, 영상 통화까지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됐지만 조금
불편하던 당시가 그립기도 합니다. 사진 속 치마저고리 차림 여성 교환원은 지금은 70~80대쯤 되셨을 것 같네요. 전화교환원은 당시엔 대단한 직업이었답니다.
1965년 한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당시 교환원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사에는 우수 직원으로 표창을 받은 한 제주
전신전화국 교환원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500번(당시 제주 공전식 안내 번호가 500번이었음) 미스 한’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교환원은 “가입 전화 1300대 중 1000대의 전화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다. 관공서는 물론 웬만한 회사, 다방, 가정 등의
번호를 암기하고 있다”며 “길을 가다가도 간판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이 습관이 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교환원에 따르면 하루에 번호 문의가 가장 많은 시간은 오전 11시에서 정오 사이이며 퇴근 시간대인 오후 6시 전후에도 문의가 많이 왔었다고 합니다. 또 늦은 밤에는 주당들의 희롱 전화에 시달렸다고도 합니다.
<사진 2> 정사원.
계수기로 대체된 ‘정사원’
은행에서 돈을 세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바로 정사원입니다. <사진 2>는 1950년대에 한국은행 정사과 직원들이 돈을 세고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 정사원들은 지폐를 권종별로 분류하고, 유통에
적당하지 않은 손상된 지폐를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는 일을 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 은행의 정사원 수가 수천 명에 달했지만 요즘은 지폐 계수기로 돈을 세고 수명이 다한 지폐도 기계로
가려내기 때문에 정사원이라는 직업은 사라졌습니다. 숙련된 정
사원들은 1시간에 6000장의 지폐를 셀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또 손끝의 감촉만으로 위폐를 가려내기도 했습니다.
정사원은 고된 직업이었습니다. 1979년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정사원 한 명이 하루에 적게는 1억 원에서 많을 때는 3억 원까지 돈을 셌다고 합니다. 또 한 장이라도 잘못 세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다고 합니다. 적응력이 느린 사람도 두 달 정도 훈련을 받으면 우수한 정사원이 돼 빠르게 돈을 셀
수 있다고 기사에 쓰여 있습니다.
- 사진 김천길
-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
-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