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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4월호

시인 나태주 청춘을 위로하는 희수喜壽의 시인

팬데믹 시대 출판계에선 나태주 시인의 책이 쏟아졌다. 시집·산문집·시선집·회고록·편지집·동화집·공동시집·필사시집·컬러링시집·동시집·청소년시집…. 올해 출간된 책만 벌써 4권. 에세이 《봄이다,살아보자》를 비롯해 노래 산문집, 시화집처럼 다양한 종류의 책을 펴냈다.
젊은 사람이 찾는 나이 많은 시인

1945년생. 만 나이로 77세 희수喜壽를 맞은 시인의 글을 찾는 이들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독자들의 나이대가 낮았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봄이다, 살아보자》의 독자의 30%가 20대, 30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인스타그램에도 그의 시를 필사해 올린 사진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로 등단해 51년 동안 시를 발표한 그의 글을 젊은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이다.
충남 공주시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서면으로 이유를 물었다. 천명天命과 인기人氣와 세운世運이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이라는 겸손한 답이 돌아왔다.
“천명은 하늘이 주시는 목숨이거나 사명이고, 인기는 인간 자신이 노력하여 생기는 힘이고, 세운은 세상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회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좀 맞았노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직선으로 이루어진 천명과 인기가, 수평선은 세운과 만나 십자가를 이루는 순간 그 사람은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나태주에게 잠시 조금 요즘에 허락된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한때의 유행이고 경향성입니다.”
그는 코로나19 때문에도 자신의 책이 많이 팔렸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음을 치유받기 위해 시를 찾는 것은 이해됐다. 하지만 꼭 나태주의 시여야 했을까. 재차 묻자 그는 조심스레 진심을 내놓기 시작했다.
“시의 표현이 쉽고요. 시의 길이가 짧고요. 구성이 단순하고요. 그러다가 가끔은 임팩트 있는 문장이 들어가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독자들이 나태주의 시를 읽는 것 같아요. 아니, 찾는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시가 늘 밝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점도 인기의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무릇 시란 상처와 아픔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그는 “시는 상처의 꽃”이라고 말했다. 꽃은 시인이 먼저 겪고 아파서 나오는 결과물이라고, 시인은 아픔을 모두 삭히고 극복하고 내려놓고 그 자리에 꽃을 대신 피운다고 했다.
“내 시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밝은 것 같지만 바닥엔 힘든 일, 괴로운 일, 어두운 일, 외로운 일들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독자들은 모두가 우울하고 답답하고 불행합니다. 어둡기 때문에 빛을 원하고 춥기 때문에 온기를 바랍니다. 그 빛과 온기를 나태주의 시가 조금, 아주 조금 보태주기에 나태주의 시를 찾는 거라고 봅니다.”
어찌 보면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보다 나태주의 시에 대중이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인 그에겐 난처한 질문이겠으나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왜 인기를 끌지 못하는지 물었다. “시인들이 미처 극복하지 못한 상처를 드러내 보여주니까 독자들이 외면하는 것”이라는 솔직한 답이 돌아왔다. 독자는 우울·답답·불평·불행·원망의 시를 원하지 않는데 시인들은 쓴다는 것. 그는 자신의 시처럼 비유를 들어가며 쉽게 이야기를 했다.
“여기 식당이 있는데 식당에 손님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식당 주인에게 있을까요? 아니면 손님에게 있을까요? 손님들 입맛에 맞지 않게 음식을 만드니까 손님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들은) 세상의 담론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거대 담론, 상층 담론이 아닙니다. 생활 담론, 미세 담론입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이제 이념이나 파당이나 맹목적인 유행에 따라 인생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꿈꾸고 좋은 방향으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이제는 이념이나 유행이 아니고 취향입니다.”
필자 역시 그의 시론詩論에 적극 동의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온기를 찾아 젊은 시인보단 그의 시를 찾아 읽곤 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비탈길을 오르다 지쳐 쉬고 싶을 때,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에 빠졌을 때, 여기저기 지름길과 절벽이 가득한 인생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그는 쉽고 따뜻한 언어로 토닥인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찾아내곤 한다.
“내 비록 잡초일망정 나 스스로는 풀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다른 이들에겐 내가 하찮은 풀꽃으로 보였겠지만 나 자신은 나를 소중한 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아니, 꽃이 되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것이 길이다. 그것이 나의 길이고 또 너의 길이다.”(《봄이다, 살아보자》 중)

사람들은 이제 이념이나 파당이나 맹목적인
유행에 따라 인생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꿈꾸고 좋은 방향으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이제는 이념이나 유행이 아니고 취향입니다.

가난하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역할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가치관을 자기 자신이나 내부에 두지 않고 타인이나 외부 세계에 두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속도는 빠르고 세상은 지나치게 반짝이고 남들은 다 잘나 보이고 다 잘사는 것 같다고 느낀다는 것. “스스로 부족한 사람 같아 보이다가 끝내는 실패자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까지 갖게 된다”는 그의 뼈아픈 지적에 허를 찔린 듯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선 가치관이든 인생관이든 자기 나름의 방향과 기준을 정하고 그를 따라 살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고, 자존감은 내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란 걸 먼저 아셨으면 합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그런 다부진 결의부터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그는 단단한 마음을 지닌 채 젊은 시절을 지나왔을까.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 너무나도 가난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시절 봉급 담당 교사가 누런 봉투에 담아준 돈을 바지 앞주머니 불룩하니 넣고 와 아내에게 내밀던 날이면 아내는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장만해 밥상에 올려놓곤 했다. 하다못해 생선 한 마리라도 사다가 요리를 해서 올려놓곤 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반찬값이 떨어지면 아내는 정육점에 가서 돼지고기 반 근을 끊어다가 찌개를 끓였고, 돈이 바닥이 나면 돼지고기 반 근의 반을 끊어다 반찬을 만들기도 했다고 신간에서 고백한다.
왜 가난하던 시절에도 그는 시를 썼을까. 지금의 젊은 세대 시각으로 보면 몰래 아르바이트라도 뛰어야,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목을 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속물의 입장에서 묻는 내게 그는 단호하게 “나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시인이 되는 것, 시인으로 사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현실 생활이 많이 서툴고 부족했다고, 그 바람에 가족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 많았다고, 무엇보다 돈이 부족했다고 털어놨다.
“나는 돈 잘 버는 사람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교사,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남편, 아버지, 아들의 일을 해야 했고, 문단이나 사회에서는 시인이나 문화계의 일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면에서 최소한의 역할만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역할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평생 시를 써온 그가 신간에서도 강조하는 건 ‘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시 <풀꽃>)처럼 《봄이다, 살아보자》에서도 혼자보단 함께 걸어가는 삶을 강조한다. “이쪽에서 ‘너’라고 하면 저쪽에선 ‘나’가 된다. ‘나’는 ‘너’의 슬픔을 알아주고 고달픔을 위로해 주는 동행이 된다”는 문장은 ‘너’와 ‘나’를 연장선에서 함께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왜 ‘나’가 아닌 ‘너’ 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 없는 네가 없듯이 너 없는 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와 ‘너’는 언뜻 둘 같지만 그 내막은 하나라고, 이 세상을 잘 들여다보면 ‘나’ 한 사람과 그 ‘나’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너’로 구성돼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렇다고 그가 ‘나’ 없는 ‘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잘 유지되고 잘 살아가려면 너의 협조나 동행이나 배려가 없으면 안 됩니다. 나도 중요하지만 너도 중요합니다. 나의 입장, 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며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입장과 시각을 더불어 가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인, 석가의 자비심慈悲心, 예수의 긍휼矜恤이 결국은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제가 아는 제일 좋은 말로 이 물음의 답을 완성합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기소불욕물시어인, 己所不欲勿施於人. 공자의 《논어》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를 더 보탠다면 교보생명의 창업자인 신용호 선생의 말씀입니다. 그분은 평생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을 위하여 불도를 닦는 일란 말씀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합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역할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순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 부드러운 마음

그는 산문을 잘 쓰는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산문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산문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그는 먼저 “시와 산문은 서로 다른 문장”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시가 감정이라면 산문은 생각이나 사건에 대한 경험을 소재로 사용한다는 것. 그는 표현 방법도 다르다고 했다. 시는 가슴속에서부터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될수록 상처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라면, 산문은 생각과 경험을 더욱 정밀하게 가장 적절한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라고 했다.
“시는 계획이나 설계가 가능하지 않지만 산문은 미리 계획하고 메모를 하고 자료를 준비해 그것들을 한데 섞어 설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품이 넓은 문장으로는 시보다 산문 쪽이라 시를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도 가끔은 산문의 신세를 지는 것이죠. 시는 감동에 목적이 있지만 산문은 설득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산문은 의도가 분명해야 하고 문장의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명징해야 합니다. 시의 문장에 오해의 요소가 약간 허락된다면 산문의 문장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는 작가지만 글로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에겐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그도 이에 흔쾌히 응답한다. 골방에 틀어박혀 쓰지 않고 대중과 소통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시인이 강연을 하는 건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했다. 강연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시간이고, 나아가 인간의 영혼과 영혼이 하나가 되는 숭고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연료가 문제가 아니다. 물론 강연료를 안 받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문학 강연이란 사람을 만나는 소중한 기회”라고 했다.
“코로나19 이전엔 1년에 200회 정도 전국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2020, 2021년은 100~150회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모든 강연 청탁을 소화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올해부터는 한 달에 10번 정도로 줄여서 강연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그는 주된 시간을 칩거하면서 지낸다. 새로운 책을 집필하는 과업이 늘 앞에 있기 때문이다. 자고 싶으면 아무 때나 자고 깨어서 일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깨어 일하고, 가끔은 아내와 함께 가까운 산책로를 한두 시간 걷는다. 가끔은 공주시에 있는 나태주 풀꽃문학관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문학관의 꽃과 나무들을 돌본다. “나태주는 문학관 소프트웨어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나태주 풀꽃문학관을 지나다 보면 풀꽃과 함께 있는 그를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세상의 아픔을 먼저 겪어낸 시인이 쉽고 간결한 언어로 ‘강연’을 해줄지도 모르겠다.
“순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잃지 마세요. 풀과 나무들은 그렇게 나에게 보다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 나무들아 꽃들아, 고맙구나. 나도 너희들 곁에서 오래 떠나지 않으마.”(《봄이다, 살아보자》 중)

이호재_《동아일보》 기자 | 사진 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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