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문턱에 서서,
무라카미 다카시 10년 만의 국내 전시
이우환과 그 친구들 IV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 전시 전경, 부산시립미술관, 2023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노랗고 빨간 화려한 색의 꽃이 가득 피었다. 웃고 있는 꽃들 앞에서 관객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다. 일본 현대미술 작가로 일본 팝아트를 세계적 반열에 끌어 올린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 Takashi Murakami의 <웃는 꽃> 연작이다. 웃고 있는 꽃을 마주 보면 같이 웃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웃고 있는 꽃들의 향연은 어느 순간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감을 준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의도한 카와이(귀여운) 하면서도 기괴한 카이카이키키(기기괴괴奇奇怪怪) 월드다.
“나의 업적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는 현대미술의 문턱을 낮추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 아닐까. 물론 일각에선 예술을 훼손한다는 비판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시를 보고 즐거웠나? 혹은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판단은 사실 작가나 평론가가 아닌 관객의 몫이다.”
지난 1월 27일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규모 개인전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시작했다. 대규모 회고전답게 보험가액만 958억 원에 달한다. 국내 전시는 2013년 삼성미술관 플라토 이후 10년 만이다. 미술관의 오랜 프로젝트인 ‘이우환과 그 친구들’의 네 번째 전시로, 이우환 화백이 무라카미 다카시를 직접 초대했다. 무라카미는 이우환 화백에 대해
“일본 현대미술계에서 굉장히 존경하는 이우환 선생님의 초대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영광이어서 바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카메라 100여 대가 포진한 포토라인 앞에서 온갖 카와이 포즈를 취하던 그였지만, 이우환 화백이 나타나자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진중한 표정으로 전시장을 안내했다. 일본 내 이우환의 영향력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727 드래곤(727 DRAGON)>, 2018, Acrylic on canvas mounted on aluminum frame, 300x450cm, Kwon JiYong collection ⓒ2018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스파클/탄탄보: 영원(Sparkle/Tan Tan Bo: Eternity)>, 2017, Acrylic, gold leaf and platinum leaf on canvas mounted on wood panel, 240x735cm, Francois Odermatt collection ⓒ2017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본인의 업적이라고 하는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3월 12일까지 한 달 남짓 열리는 전시는 관객을 ‘쓸어’ 모았다. 주말이고 주중이고 긴 대기 줄이 이어지고, 미술관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량의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유료 전시였다가 부산시의 결정으로 무료로 진행된 것도 한몫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작업들 덕택에 해시태그엔 #부산시립미술관 #무라카미다카시가 넘쳐난다. 마케팅의 천재일 뿐, 예술의 본질을 흐린다는 날 선 비판에도 관객들은 만족한 표정이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관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작품은 <727 드래곤>2018이다. 권지용GD 컬렉션이다. 이외에도 최승현TOP 컬렉션인
<727 둠 다다>2017-2020도 전시됐다. 유명인의 컬렉션으로 눈길을 끌어 전시 집중도가 훌쩍 높아진다. 이 같은 관심은 과연 같은 작가의 작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1988년 초기작, 과도한 성적 판타지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묘사한 히로뽕hiropon 시리즈, 원자력 발전 등 환경 문제를 이슈로 하는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17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전시가 늘어지지 않는 데는 빠른 전환과 강력한 이미지가 한 축을 차지한다.
이우환 화백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이 같은 역량을 이미 알아봤다. 그는 전시를 위해 직접
손 편지를 썼다. “무라카미 님의 작품은 얼른 보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다시 보면 독이 있고 강한 비판성이 감춰져 있어 지나칠 수 없습니다. 90년대 중반 아시아를 휩쓸고 곧 세계 미술계에 무라카미 바람이 분 것을 기억해요. 야릇한 만화 수법이랑 때로 키치하기도 하고 시니컬한 패러디가 보는 이를 사로잡았지요. 기상천외의 해프닝을 벌이는 소녀 소년상이라든가, 앞면이 자애로운 미소인가 하면 뒷면은 잔인한 악마의 표정인 불상 같은 작품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히고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어쨌거나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힘찬 표현은 보는 이를 웃게 하고 생기 차게 합니다. 언제나 넘치는 패기와 부정과 긍정 반전 역전의 드라마성에 놀랍니다. 코로나로 위축된 상황에 힘찬 예술가의 외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드라마와 스토리를 사랑한다. 고전이나 설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상에 대한 이유와 근원의 설명은 늘 흥미롭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2022다. 재난 상황에서 좀비가 되어버린 본인과 반려견의 조각이다. 흘러내리는 내장과 녹아버린 근육, 드러난 뼈가 너무나 현실적이라 기괴함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8살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미술관에 갔다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을 보게 된 무라카미는 크로노스가 자식의 머리를 뜯어먹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를 찾은 누군가도 이 작품을 보고 비슷한 충격을 받을까. “병, 재해, 전쟁 등 인간에겐 다양한 공포가 있다. 그것이 실체화한 것이 괴물과 악마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이런 공포가 있었지 하고 공감해주길 바란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카이카이키키 월드로 입장할 시간이다.
글 헤럴드경제 기자 이한빛
사진 부산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