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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6월호

세기말적 징후와 새로운 시작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과 <벚꽃동산>

바야흐로 건강한 초록이 세상을 점령했다. 마스크를 벗어던진 후에도 상처는 굳은살 같은 흉터로 남겠지만 겨울을 버텨낸 나무가 잎을 틔우듯 마음에 새살이 돋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나무의 살결마다 아로새겨진 나이테처럼, 우리가 겪어낸 이 순간도 기억되고 노래될 것이다. 사람들은 조심스레 희망을 이야기하고 6월 공연계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삶이 그러하듯 연극은 계속돼야 한다.
<기후비상사태: 리허설>
우리는 지구 멸망의 시계를 늦출 수 있을까? <기후비상사태: 리허설> | 5.11~6.5 |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동시대적 화두를 탐구하며 기후 위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창작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시작한다. 기후 재앙이 인류의 턱밑까지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기후비상사태’는 쉽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구의 수명을 24시간으로 가정했을 때 인류 멸망까지 60초가 채 남지 않은 이 순간에도, ‘지구의 위기’가 ‘나의 위기’로 감각되지 않는 현실을 꼬집으며 인류가 직면한 이 거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을 토로한다.
11개의 캐릭터(자아)로 분열된 화자 ‘나’는 “내 앞에 놓인 위기들이 더 크니까. 그게 진짜니까. 지금 당장 내 위기, 내가 죽겠는데 무슨 기후 위기야?”라는 날 선 목소리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MZ세대의 심리를 대변한다. ‘환경보호’라는 거대 담론을 ‘나의 문제’라는 개인적 관점으로 접근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던 연극은 “브레이크 없이 달려온 인류의 욕망을 스스로 멈출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 질문으로 나아간다. 혼란스러운 성찰 과정을 통해 우리가 기후 위기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라는 뼈아픈 현실 인식에 이르고 ‘기후비상사태’가 신자유주의 경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지적한다.
성장 신화와 속도전에 매몰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우리 주변의 불평등, 착취, 폭력으로 자란다는 연극의 주제는 통계나 숫자, 구호나 이념이 아닌 구체적인 ‘나’의 이야기를 통한 감각과 감정 전달이 예술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완벽한 어둠(암전)처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우리 삶에도 암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극 중 바람이 긴 여운을 남긴다.

<벚꽃동산>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벚꽃동산> | 5.13~6.11 | 안똔체홉극장

귀족 출신의 미망인 라넵스까야가 5년 만에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며 극이 시작된다. 인간사 희로애락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을 맞은 벚꽃동산에는 순백의 벚꽃 무더기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체호프의 <벚꽃동산>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 다양한 인간 군상이 빚어내는 해프닝을 통해 삶이라는 희비극의 아이러니를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포착해 냄으로써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사실주의 연극의 걸작이다.
성병숙 배우의 ‘라넵스까야 부인’ 연기가 보고 싶어 주말 공연 시간에 맞춰 안똔체홉극장을 찾았다. 고전의 향기를 곱씹어 보려 한자리에 모인 신구 세대로 객석의 열기가 뜨거웠다. 작은 무대 위에서 회한, 분노, 현실 부정, 연민, 새로운 희망, 사랑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의 욕망이 들끓었다. 체호프가 창조한 세상 속에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이 공존하고 극 중 인물은 잘 구워진 페이스트리 빵처럼 겹겹으로 싸인 감정의 속살을 숨기고 있다.
새로운 시대와 변화를 상징하며 구시대의 대칭점에서 극의 균형을 맞추는 신흥 계급 로빠힌은 변화를 외면해 무너져 가는 에덴동산(벚꽃동산)을 지키려는 라넵스까야 부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연민한다. 지난 시대와 작별하며 텅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는 것은 소멸하는 시대에 대한 늙은 하인 피르스의 허무와 회한뿐이다.
침몰하는 배 위에 남은 이는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며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벚꽃나무는 베어졌어도 벚꽃동산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피고 질 것이다. 상처가 깊은 흉터를 남기듯, 잊히는 것들의 향기는 존재의 짙은 자국을 남긴다. 21세기에도 체호프의 희곡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전영석_《PAPER》 기자 | 사진 제공 국립극단, 애플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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