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책길 속 극락정토, 홍은동 서울무용센터
5월 5일 어린이날 오전, 홍은동에 있는 서울무용센터를 찾았다. 서울무용센터는 백련산 아래 명지초등학교와 명지고등학교 인근의 주택가 끝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서부도로교통사업소로 사용하던 공간을 2011년 홍은예술창작센터로 개관했고, 2016년부터 무용 장르 특화 공간인 서울무용센터로 운영하고 있다.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에 위치한 서울무용센터는 예술이 삶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생활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간을 통해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백련산 아래 자리한 국내 유일의 무용 전문 레지던시
이날의 방문은 오전 11시부터 시작하는 ‘서울 스테이지11’의 무용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올해 4월부터 진행하는 ‘서울 스테이지11’은 매달 첫 번째 목요일 오전 11시, 총 11개 창작공간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예술 공감 콘서트다. 이날은 서울무용센터 2층의 무용연습실에서 〈[잼:잼]무용&음악의 즉흥적인 만남〉이라는 현대무용 공연이 있었다.
가로, 세로 15m의 넓지 않은 공간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현대무용에 무지한 나로서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공연이었지만 40여 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로웠고 집중도 잘됐다. 관객과 공연자가 함께 만드는 무대였고, 현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함께 놀 준비가 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무용센터는 국내 유일의 무용 전문 레지던시로, 무용 예술 창작 활동을 위한 다양한 인프라를 지원하고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이다. 총 네 개의 무용연습실과 두 개의 스튜디오가 있고, 선정된 무용예술가가 머물며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섯 개의 호스텔 ‘예술가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무용센터를 나와 명지고등학교와 명지초등학교 사이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태고종 사찰 백련사에 가기 위해서다. 아직 5월 초였지만 마치 초여름처럼 더운 날씨라 혹시나 해서 입고 온 두꺼운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나뭇잎이 울창한 터널을 이루는 숲속 산책로가 나타났다. 높지 않은 계단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다 보면 백련사길과 만난다. 홍은동 주민들이 산책하는 백련산근린공원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종로구나 중구에 빽빽하게 박혀 있는 손바닥만 한 동네와 비교하면 이곳 홍은동은 한참 넓어서 걸어 다니기도 쉽지 않다. 같은 홍은동이라도 동네 분위기가 제각각이라 마치 다른 동네에 온 것 같다.
서울무용센터가 위치한 백련산 아래 홍은동은 북쪽과는 또 다른 분위기인데 중간에 자리한 백련산 때문인지 백련산 위쪽과는 도무지 같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해발고도 200m가 조금 넘는 동네 뒷산임에도 말이다. 그 동네 뒷동산에 백련사가 있고 그 앞으로 가끔 10번 마을버스가 다니는 한적한 길이 있다.
이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도무지 빈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서울의 전형적 사람 사는 동네가 펼쳐진다. 오늘처럼 제법 여름 흉내를 내는 5월 초의 더운 날씨에는 도로 주변의 나무 그늘을 따라 쉬엄쉬엄 걸어야 한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조용한 길이다.
백련사와 홍은동, 모세혈관처럼 연결된 절과 동네
그렇게 걷다 보면 백련사의 화려한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위 현판에 ‘삼각산정토백련사三角山淨土白蓮寺’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옛날 사람들은 북한산을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렀다. 백련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처음 이름은 정토사였다. 부처님이 계시는 청정한 땅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다 세조의 장녀인 의숙공주가 부마인 하성부원군 정현조의 원찰로 정하면서 절 이름을 백련사로 바꿨다.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백련사는 희고 붉은 연등으로 장식돼 있었다. 백련사는 고요한 산속에 독야청청 자리하는 다른 산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절이다. 그곳은 백련산 아래 경사지에 자리 잡은 홍은동의 좁은 골목과 모세혈관처럼 연결돼 있어 어디까지가 절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마을의 영역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마을이 절을 품고 있고 절은 마을의 일부처럼 보였다. 불교 교리의 엄중한 원리가 마을 속 삶의 골목에 너그럽게 풀어져 있었다. 극락정토가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 사는 동네가 곧 극락정토라고 말하는 듯했다. 종교적 이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골목과 계단이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백련사에서 일주문은 절의 상징적 정문으로 존재할 뿐 절 곳곳이 입구가 되어 마을과 만난다.
백련사를 나와 다시 백련사길을 걸어 돌아 나온다. 들어갈 때 지나쳤던 백련사 부도밭을 자세히 바라본다.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부도와 공덕비를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천년 백련사의 역사가 이곳에 모여 있었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사리탑을 가리킨다. 부도밭을 지나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팔각정이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백련산으로 올라간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등산하는 기분이 아닌 산책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올라야 한다. 등산로는 마을 주민의 산책로이기도 하다. 5월의 푸른 잎이 싱그러운 초록색 그림자를 적당하게 드리우는 기분 좋은 산길을 올라가면 곧 백련산 정상이다.
백련산 정상의 은평정에 서면 멀리 상암동과 은평구 일대가 잘 보인다. 백련산 정상을 경계로 북쪽이 은평구 응암동, 남쪽이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이곳 정상에 매바위가 있다. 응암동의 지명이 이 매바위에서 나왔다. 백련산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매사냥을 즐겨 응봉이라고도 불렸다.
백련산 산책로는 요즘같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 오르기 딱 좋다. 굳이 등산화에 등산복도 필요 없다. 서울 도심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오래된 사찰과 녹음 짙은 산책로를 품은 조금 만만한 뒷동산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홍은동 백련산에 가보자.
글·그림 정연석_《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