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사람과 사람

10월호

전시 <Once Upon a Time>과 <April Fool 2020> 단절의 시대, 과거와 현재를 상상력으로 불러들이다
단절의 시대다. 작업실에 틀어박힌 시각예술가들은 일상과 과거의 역사를 상상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올가을 서울 화랑가에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되는 국내외 작가의 전시가 펼쳐진다. 한민족의 고대사 풍경을 사실주의(리얼리즘)의 눈길로 떠올리며 재현한 최민화 작가의 초대전 <Once Upon a Time>과 코로나가 엄습한 일상 속 자화상을 포착한 네덜란드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의 신작전 <April Fool 2020>이다. 두 작가의 작품은 소재와 기법, 시각이 크게 다르지만, 색다른 공통점도 갖고 있다. 작품이 품은 화두가 이 시절 예술가들의 고민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창작 과정에서 과거 미술사적인 유산을 십분 활용해 재해석한다는 점이 그렇다.

※해당 전시 일정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변경 또는 취소될 수 있습니다.

최민화의 <호녀>(2020)

1980년대 투사 작가가 메이저 화랑에 내건 고대사 그림 <Once Upon a Time> | 9. 2~10. 11 | 갤러리현대

최민화 작가는 시대와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한다는 사실주의(리얼리즘) 그림의 본령을 평생 지켜려 애써왔다. 1980년대 청장년 시절엔 진보미술 진영의 현장 활동가로 일했다. 도심 거리의 민주화 시위에 쓸 걸개그림을 만들고 만화운동을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노제에서 대중에게 선연한 기억을 남긴 열사의 대형 부활도가 그의 작품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80년대 거리 투쟁의 기억과 그 시절 소외된 도시 룸펜 청년들의 일상을 분홍빛 화폭에 담아내며 낭만적 사실주의를 한국 현대미술사에 아로새겼다.
이런 전력에 비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지난 9월 초 마련된 그의 개인전 <Once Upon a Time>은 격세지감을 일으킨다. 30여 년 전 이른바 ‘열혈 운동권’이던 그가 국내 최고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사실은 시대의 정서가 바뀌었음을 일러준다. 1990년대 말 이후 조선 상고사 연작에 몰두한 작가는 2018년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한 뒤 리얼리즘 화가로 재조명되면서 이를 주목한 화랑 쪽이 1년간의 준비 끝에 초대전을 마련했다.
출품작들은 작가가 20년 이상 고대사, 미술사 공부와 국내외 답사 등을 하면서 숙성시킨 역사화다.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 신라의 건국신화 등 《삼국유사》에 나오는 민족사의 시원적 사건들을 옛사람들의 몸짓과 공간의 구체적 풍경으로 펼쳐 보인다. 전통 불화, 민화, 풍속화, 힌두 미술, 르네상스 회화 등을 두루 섭렵하며 도상을 연구한 덕분에 동서고금 회화사의 특징이 두루 섞여 낯설게 펼쳐지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환웅이 신시에 내려와 웅녀(곰)와 호녀(호랑이) 가운데 배필을 간택하는 장면이나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탄생하는 장면 등을 담은 그림들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도상들과 인물의 배치나 화면 구성 등에서 흡사한 구도를 보여준다. 고대 이상향을 묘사한 <신시>는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도상이 르네상스 명화의 인물 도상, 힌두 미술의 노란빛 색조와 결합된다. <호녀>의 경우 단군신화에서 토굴에 은거한 웅녀와 달리 운명을 거부하고 굴을 나간 호녀를 서구풍의 주체적 여성으로 강조한다.
동서고금의 도상들이 편집하듯 엮인 출품작들은 색조의 엷고 슴슴한 표현과 더불어 고대 시공간에서 펼쳐진 인간 행위의 보편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작가는 “민중의 정신적 원형을 담은 고대사 시·공간의 형상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지난 20여 년간 동서고금의 역사, 미술사를 섭렵하며 그림의 전범을 찾는 작업을 거듭해 왔다”고 말한다.
1, 2층의 출품작 30여 점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 고대의 세상과 문명을 리얼리스트의 눈길로 주시하고 재구성한 산물이다. 20년 이상 드로잉과 초벌그림, 수채화, 유화 등의 소품에 수없이 습작하며 빚어낸 고대 시공간의 이미지를 최근 1년 사이 큰 화폭에 유화로 옮겨 그린 역작이란 점에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성을 내뿜는다. 200점에 가까운 원본 습작 소품을 내건 지하층 아카이브실에서 작가가 품었을 창작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다.

어윈 올라프의 <April Fool 2020, 9.45am>(2020)

‘만우절’ 같은 코로나 일상 뜯어본 사진가의 자화상 <April Fool 2020> | 9. 2~30 | 공근혜갤러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작업해 온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는 지난해까지 세계 사진계에서 가장 바쁜 작가 중 하나였다. 역사적 위인들이나 동서양 대도시를 소재나 배경으로 삼아 인종차별, 폭력, 빈부격차 등의 지구촌 현안을 상징적으로 부각한 그의 연출 사진은 시장과 평단에서 모두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봄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에 퍼지자 그는 ‘거대한 미지의 것’이 세상을 뒤집어놓았음을 직감하곤 작업을 멈췄다. 유전성 폐질환을 앓는 터라 낯선 곳에서 숨 쉬기도 두려워 사무실 직원과 가족 외엔 만나지 않게 됐다. 그가 패닉에 빠지게 된 건 지난 3월 말 암스테르담이 봉쇄되기 며칠 전 시내 단골 슈퍼마켓에서 본 광경이었다. 늘상 둘러보던 안쪽 선반 자리에 늘상 있던 식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상상해 본 적 없는 현실이 눈앞에 닥치자 공포를 느꼈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생각했다. ‘내가 4월 1일 만우절에 속은 바보였으면. 이 풍경이 속임수라면…그런 감정을 어떻게 사진으로 보여주지?’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9월 30일까지 열린 작가의 신작전 <April Fool 2020>은 이런 일화가 계기가 되어 급히 제작한 코로나 이후의 자화상 사진들로 이뤄졌다. 일상의 고통스러운 변화에 부딪힌 작가가 느낀 격렬한 공포감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을 담아 연극적 얼개로 만든 연출 사진 10여 장이 나왔다. 작가는 작품에 특정 시공간을 설정했다. 4월 1일 오전 9시 15분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암스테르담의 슈퍼와 거리, 공원, 작가의 방이다. 광대처럼 얼굴에 분칠하고 고깔모자를 쓴 올라프는 설정된 2시간 15분 동안 침울한 표정과 태도로 코로나19가 바꾼 일상 속을 지나쳐 간다. 카트를 끌고 텅 빈 주차장을 통과해 매장에 입장하지만, 텅 빈 진열대와 무표정한 직원을 두고 앞만 바라보며 서 있다. 그 뒤 적막한 공원 벤치에 앉아 숲을 바라본 그는 집으로 들어가 벽을 바라보고 자신의 뒷모습 사진을 찍는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만든 위기의 풍경이지만, 사진은 불안감을 강조하지 않는다. 16~17세기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 같은 네덜란드 바로크 거장들의 정물화, 풍경화 명작을 보는 듯한 회화적 화면의 정연함 속에 작가의 쓰린 표정이 부각된다. 화면을 뒤덮는 검푸른 색조를 바탕으로 적절하게 조절된 빛이 스며들며 코로나 시대의 정서를 차분하게 바라보도록 시선을 이끈다. 올라프는 서면 인터뷰에서 “미지의 압박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과 마음이 마비된 느낌을 담아낸 것이 이번 신작”이라면서 “광대 분장과 고깔모자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나 자신의 감정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글 노형석_《한겨레》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 공근혜갤러리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