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캐스트의 힘
"새로운 배우가 와서 장면을 다시 맞추는 게 더 힘듭니다.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눈빛으로 에너지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 원캐스트가 주는 분명한 힘이 있습니다." 연극 <오이디푸스> 제작발표회에서 "한 배역을 한 명의 배우가 맡아 원캐스트로 연기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한 '천만 배우' 황정민의 답변이다. 황정민을 앞세운 공연기획사 샘컴퍼니는 지난해 <리차드 3세>에 이어 <오이디푸스>에서도 원캐스트를 일종의 '원칙'이자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워 화제가 됐다.
<오이디푸스>는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이어 3월에는 전주, 광주, 구리, 여수, 4월에는 울산까지 5개 도시 공연을 이어간다. 지방 공연 역시 원캐스트다. 코린토스 사자 역을 맡은 중견배우 남명렬은 모친상 중에도 빈소가 차려진 대전과 공연이 열린 예술의전당을 오가며 출연했다. 그는 앞서 제작발표회에서 "연극은 원캐스트가 기본이고 원칙"이라며 "연극배우들이 매체 연기를 많이 하면서 스케줄상의 문제로 인해 더블캐스트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국립극단은 지금까지 더블캐스트로 한 게 한 번 정도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명렬은 결국 자신이 한 말을 끝까지 지킨 셈이다.
지난 3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대학살의 신>도 남경주, 최정원, 송일국, 이지하 등 4명의 배우가 원캐스트로 출연했다. 2017년 공연 때 출연한 배우 그대로 다시 앙상블을 맞췄는데, 모든 배우가 그대로 출연하는 것을 재공연의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서는 배우 한 명 한 명의 이름값과 각자의 스케줄을 고려하면 더블캐스트가 아닌 게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 같은 원캐스트 출연은 2017년 뮤지컬 <시카고> 등에서 원캐스트로 공연을 올린 제작사 신시컴퍼니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우리 공연계에서는 뮤지컬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도 복수의 배우가 번갈아 출연하는 멀티캐스트가 적지 않다. 그 때문인지 원캐스트 작품들이 오히려 주목받는 시대가 됐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는 원캐스트가 일반적이며, 국내 무대에 오르는 외국 오리지널 팀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해외에도 '언더스터디'와 같은 대역 배우 개념은 있다. 정식 캐스팅된 배우보다 적은 회차로 주 1~2회 무대에 오르는 '얼터너티브'나 주연 배우가 무대에 서지 못할 때 투입되는 '언더스터디' 등이 있지만, 이는 두세 명의 배우가 동등한 출연 회차를 보장받는 더블캐스트, 트리플캐스트와는 다소 다른 개념이다.
연극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성실한 배우가 좋은 무대를 만든다
과거 공연계에서는 멀티캐스트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누군가의 '대타'처럼 작품에 출연하거나, 인기투표를 하듯 관객이 'A배우냐, B배우냐' 선택하는 것 자체가 배우로서는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멀티캐스트는 공연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무엇보다 아이돌 가수나 스타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이들이 공연을 방송, 영화 등의 '본업'과 동시에 소화하려면 멀티캐스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멀티캐스트가 공연계의 마케팅 수법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스타 배우나 아이돌 가수의 '티켓 파워'에 의존하는 것이지 관객이 배우를 골라 공연을 볼 수 있는, 관객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행위가 아니라는 비판이었다. 결국 티켓 파워에 의존해 번 수익은 고스란히 스타 배우들의 고액 출연료로 나가는 악순환도 반복됐다.
멀티캐스트에 대한 비판은 반대로 원캐스트를 옹호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배우가 홀로 자신의 작품을 책임진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자, 작품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최근 원캐스트로 배역을 맡은 아이돌 출신 피오(표지훈)의 경우, 공연계 일각에서 '가수의 외도'가 아니라 배우로서 진지하게 작품에 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연극 <소년, 천국에 가다>에 악역인 파출소장으로 출연했는데, 작품 속 다른 배우들과 달리 홀로 배역을 맡았다. 아이돌의 원캐스트 출연은 '본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멀티캐스트와 원캐스트 가운데 무엇이 옳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배우가 작품에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는 대전제는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주목받은 원캐스트 작품들은 배우의 진정한 자세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 글 안석_서울신문 기자
- 사진 제공 샘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