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항의 공존박은선 <숨 쉬는 돌의 시간> 5. 16~6. 30, 더페이지갤러리
고대 로마 건축물의 대리석 기둥을 닮은 조각 작품이 천장에 매달렸다. 높이 4~5m, 한 점당 무게만 무려 1.2t(1,200kg)이다. 박은선 작가의 개인전이 지난 5월 16일부터 서울 성수동 서울숲 갤러리아포레에 위치한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더페이지갤러리는 총면적 600여 평에 층고가 5.4m인 6개의 공간으로 리뉴얼을 마치고, 첫 재개관전으로 박은선 작가의 조각 2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는 천장에 매달린 대리석 기둥 3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층층이 쌓아올린 은빛 대리석은 미끈한 표면과는 대조적으로 군데군데 균열이 나 있다. 곧 무너져 내릴 듯 긴장감을 주는 대리석 기둥은 육중하고도 견고하다. 박은선의 조각은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아우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시 평문에 인하대 정현 교수는 “모더니스트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고전주의를 거절하는 것과 달리 박은선은 무한과 불멸이라는 생 너머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제시하는데, 이는 서구 고전주의 미학의 세계관은 물론이고 생의순환이란 동양적 사상과도 일치한다”고 썼다.
작가는 색이 다른 두 개의 대리석 판을 켜켜이 쌓아올리면서 원형, 사각형, 원반과 같은 조각의 외형을 마름질하고 그 과정의 시간들을 겹쳐간다. 외형의 결과물은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조각이지만, 제의에 가까운 수행적 태도가 작업의 정신적 가치를 더한다. 거칠게 파괴된 돌과 정교하게 표면이 처리된 돌 사이의 조형적 구성을 통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이에 반하는 인공적인 것, 여기에 철저하게 계산된 과학적 엄격함을 작품 안에 녹인다. 이 같은 기하학적 추상을 통해 동양과 서양, 고전과 모던, 균형과 불균형, 통제와 자율성 등 대립항의 공존을 표현하는 박은선의 작업은 유럽 미술계에서 서양 모더니즘의 추상 조각과는 차별화되는 ‘동양적 추상 조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박은선은 경희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카라라 예술국립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25년간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2007년 7~8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시의 초청으로 ‘베르실리아나 축제’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개최한 바 있다. 매년 단 한명의 조각가를 초청하는 이 행사에는 헨리 무어, 페르난도 보테로 등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이름을 올렸으며, 박은선은 이 전시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 작가였다. 유럽 각지에서 50회의 개인전을 비롯한 200여 회의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업적을 인정받아 2015년 국민훈장을 받았다.
1 <Infinite Column - Accretion - Intension>, 2018, White Marble, 441.5(H)×41.6×41.6cm, 410.7(H)×41.6×41.6cm, 475(H)×41.6×41.6cm.
2 <Remembered Words(Whippy)>(detail), 2012~2013, Watercolor, graphite on paper, 38.1×27.9cm, 9 parts. 사진 Ron Amstutz,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언어와 정체성에 대하여 로니 혼 <Remembered Words> 5. 25~6. 30, 국제갤러리 3관
얼음장처럼 차가운 듯한 표면에 정적이면서도 육중한 유리 주조 조각으로 유명한 로니 혼의 국내 네 번째 개인전이 지난 5월 25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3관에서 열리고 있다. <Remembered Words>(기억된 단어들)이라는 전시명과 동일한 드로잉 연작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된 일련의 드로잉 작업들이다. 갤러리의 설명에 따르면, 드로잉은 전작으로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로니 혼 작업의 핵심 요소인 동시에 병치와 언어유희, 물성의 시학(詩學)을 통해 언어와 정체성에 관한 주제를 고찰하는 주요 챕터 중 하나다.
작품은 3×3 격자로 배열된 9점의 드로잉들로 구성돼 있다. 동일한 크기로 그려진 드로잉은 수채물감으로 그린 수십 개의 원들을 담고 있다. 각각의 원들은 투명하고 다채로운 색채 팔레트를 펼쳐놓은 것 같다. 원형의 무리들은 구름 낀 밤 달무리처럼, 혹은 불가사의한 발진처럼 보인다. 황갈색과 녹색, 노란색과 회색, 검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선홍색의 그라데이션이 일정한 방향 없이 서로 스며든 얼룩처럼 반복되며 율동감을 선사한다.
각각의 원은 격자 패턴을 이루며 바로 아래에 쓰인 단어들과 함께 나열되거나, 혹은 흩어진 단어들로 무질서와 질서 사이 조화로운 집합체를 이룬다. 마치 특정한 분류법에 의해 나열된 수수께끼의 단서들처럼, 동그라미와 어휘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상상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Remembered Words-(The Supremes)>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세 번째 드로잉의 좌측 하단부터 우측으로 rebus(그림 수수께끼), sissy(겁쟁이),humpback(꼽추), bogus(가짜), unface(노출)와 같은 단어들이 나열돼 있다. 또한 <Remembered Words-(Ho Ho Ho)>라는 작품은 soapy(미끈미끈한), lavender(라벤더), walk(산책), malt(몰트), pollute(오염), hallucinogen(환각제) 등의 단어들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충돌하고 공명한다. 관객들은 원형의 색채들과 매치된 단어들을 이해하려 고군분투하며 의외의 즐거움을 얻는다.
로니 혼은 1955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을 졸업한 후 예일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조각, 사진, 드로잉 그리고 출판물을 제작하며 각 영역에 대한 정의를 확장시켜왔다. 스위스 바젤 바이엘러 재단(2016),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재단과 마드리드의 라 까이사 포럼(2014),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2013~4), 함부르크 쿤스트할레(2011), 런던 테이트 모던(2009),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2004), 파리 퐁피두센터(2003), 뉴욕 디아 아트센터(2001)와 휘트니미술관(2000)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전시를 열었다.
- 글 김아미 헤럴드경제 미술, 디자인 분야 기자 및 프로젝트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 사진 제공 더페이지갤러리, 국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