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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4월호

책 <트랜스휴머니즘>과 <스웨덴 장화>인간으로 산다는 것
최근 인간의 의식에 대한 사변에 빛을 던져줄 책 두 권을 만났다. 솔직히 말하면 두 권의 책에서 비교할 수 있는 대목을 추출했다. 그만큼 책 내용과 성격이 서로 이질적이다. 하나는 대중 눈높이에 맞춘 논픽션 과학교양서 <트랜스휴머니즘>, 다른 하나는 정통 혹은 본격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호흡이 긴 북유럽의 장편소설 <스웨덴 장화>다.

명민한 영국 작가(올해 한국 나이로 71세인 작가에게 ‘명민’이라는 표현이 외람되긴 하지만) 이언 매큐언이 <햄릿>을 재해석한 장편소설 <넛셸>에는 태아의 신경세포 안에 인간 의식이 최초로 자리 잡는 환상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매큐언은 신경세포 가닥들로 짜인 황금 피륙 가운데서 비로소 한 인간의 의식이 싹튼다는 식으로, 개체 발생의 신비로운 순간을 그린다. 그렇게 생겨난 태아는 소설 속에서 자신을 잉태한 엄마와 숙부의 죄악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증언하지만, (물론 청각과 엄마의 몸 상태 변화를 통해) 이를 테면 아직 의식으로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다. 기껏해야 엄마의 자궁벽을 발로 차는 행동 말고는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얘기 같지만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종교적 상상력에서 의식은 흔히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살아남아 죽기 전에 쌓아둔 소행에 따라 죗값을 받거나 복록을 누린다. 이럴 때 나는 곧 의식인가? 어쨌든 의식은 육체에서 분리될 수 있는 존재인가? 영혼이나 귀신의 형태로? 무의식은 어떻게 되나? 무의식도 나라는 정체성의 일부인가?

트랜스휴머니즘

인간의 한계 뛰어넘기<트랜스휴머니즘> 마크 오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트랜스휴머니즘은 주로 미국, 그것도 급진적인 기술 낙관론이 지배하는 서부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죽음 극복 운동이다. 말 그대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자는 얘기다. 어떻게? 적극적인 과학기술 개발로. 인간이 절반 기계가 되는 방식으로. 책은 아일랜드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마크 오코널이 세계 곳곳에서 하나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트랜스휴머니즘 현상을 발로 뛰며 취재하는 형식이다.대표적인 갈래가 SF 영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마음 업로딩이다.(조니 뎁이 출연했던 2014년 영화 <트랜센던스>가 생각난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 두뇌 안의 모든 정보, 사소한 마음의 기미까지 놓치지 않고 샅샅이 데이터화해 신경세포나 대뇌피질 같은 육체의 플랫폼이 아니라 0과 1의 끝없는 연쇄로 이뤄지는 디지털 플랫폼 위에 되살린다는 발상이다.(책에서는 그런 업로딩 과정을 ‘모방하다’, ‘복사하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 ‘에뮬레이션’(emulation)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인간 의식은 얼마든지 육신에서 분리해낼 수 있는 무엇이다. 쥐의 뇌 절편(切片)을 완벽하게 스캔해 업로딩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실험실을 둘러보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정보야말로 나의 본질이며 우리 몸은 뇌 절편들이 보관된 유리판처럼 단순한 용기(容器)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84쪽)
지능이 곧 인간이며, 지능은 얼마든지 기계적으로 수집, 추출, 정리될 수 있는 정보라는 얘기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뇌는 ‘기본 적으로 정보처리 시스템’, 한 발 더 나아가면 마음이 곧 기계라는 생각이다.성급한 과학기술주의자,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이 모든 소동은 죽음과 노화라는 근본적인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데서 출발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닥칠 죽음을 인간의 기술로 극복하는 것이 지상목표다.

스웨덴 장화

마음의 어두운 형이상학<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뮤진트리

그에 비하면 소설 <스웨덴 장화>의 인물들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스웨덴 다도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600쪽짜리 심리극이라고 해도 좋을 이 소설은 죽음과 늙음을 무기력하게 관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은퇴한 70대 외과의사 프레드리크 벨린. 그는 한 여성환자의 엉뚱한 팔을 자르는 치명적인 의료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바닷가 고향 마을에 쫓기듯 돌아와, 할아버지가 남겨준 섬에서 혼자 산다. 용의자도, 동기도 오리무중인 의문의 연쇄 방화 사건을 배경으로 벨린이 시골 생활에서 겪는 크고 작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벨린에게 죽음과 노화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죽음은 “언젠가 내게도 찾아오게 될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이해할 수 없이 찾아오는”달갑지 않는 손님이다.(477쪽) 언제나 “우리 목덜미 뒤에서 늘 도사리고” 있는 존재다.(469쪽) 나라는 정체성, 그것의 바탕일 사람의 속마음 역시 바깥의 관찰자는 물론 당사자 본인도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시종일관 서너 살 아래의 전직 우편배달부 얀손과 심리적 대치 상태에 있던 벨린은 얀손의 기이한 실체를 목격한 후 다음과 같이 방백한다. “얀손은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그런데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603쪽) 차가운 스캐닝으로는 결코 읽어낼 수 없을 인간 심연, 사람 마음의 어두운 형이상학이다.
저자 헤닝 만켈(1948∼2015)은 스웨덴의 국민작가다. 발란더 형사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 팔렸다고 한다. <스웨덴 장화>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치면 실사 애니메이션이라고 할까? 소설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실감 난다.

글 신준봉 중앙일보 기자
사진 제공 문학동네,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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