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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4월호

엑스레이 아티스트 정태섭본질을 꿰뚫다
연세대 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 EBS 메디컬 다큐멘터리 <명의>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상의학과 전문의로 선정한 그에게는 또 하나의 직업이 있다. 국내 최초의 엑스레이 아티스트가 그것. 서늘하고 섬뜩한 흑백의 엑스레이 사진이, 그의 손끝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감성적인 사진으로 변화한다.

관련이미지 1 <좋은 날이야!>.
2 <장미>.
3 <꿈꾸는 카라>.
4 <해바라기>.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

영상의학과 의사인 나의 또 다른 직업은 엑스레이 아티스트다.엑스레이 아트란 엑스레이 사진을 합성하고, 색을 입혀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진이 빛이 부딪힌 피사체의 표면을 담는다면, 엑스레이 아트는 빛이 뚫고 지나간 내면의 구조를 보여준다.아름다운 건축물을 발견하면 그 내부가 궁금해지는 것처럼, 나는 피사체의 내부가 보고 싶어 엑스레이로 사진을 찍는다. 피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것. 그것이 바로 내가 엑스레이 아트를 하는 이유다.
나의 엑스레이 아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당시에는 작품을 위해 엑스레이 사진을 찍기보다 환자들의 엑스레이 사진에서 하트 모양의 동맥류 등을 우연히 발견하는 정도였다. 의도를 담아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본격적인 엑스레이 아트 작업을 시작한 건 한 TV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KBS 을 소개했는데, 이를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은 엑스레이밖에 없을 것 같았다. 꽃잎 모양 브로치를 입에 물고 나를 모델로 엑스레이를 찍었다. 한데 충치 치료 흔적이 남긴 거뭇거뭇한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다. 결국 건치를 자랑하는 후배 의사가 모델이 되어줬다. 이것이 바로 나의 첫 작품 <입 속의 검은 잎>이다. 2006년, 50살이 넘은 나이에 엑스레이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었다.
엑스레이 아트는 소재에 따라 다른 엑스레이 기계를 사용해 촬영해야 한다. 내 작품을 보고 엑스레이 아트를 시작한 사진가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 하더라도 기술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처럼, 엑스레이도 찍는 기술이 중요하다. 기계의 종류도 다양해 모두 익히기가 쉽지 않다. 사진과 엑스레이는 모두 빛을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진은 가시광선을, 엑스레이는 투과성이 강한 빛을 사용하기에 전혀 다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작업을 위해 엑스레이 촬영을 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바로 안전이다. 피폭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선의 조치를 한다. 촬영 대상은 나를 포함해 동료 의사나 엑스레이 기계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한정하고, 진단 목적이 아니기에 방사선의 양도 최소로 해 촬영한다. 한 번 촬영한 사람은 1년 동안 재촬영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웠다.
엑스레이 촬영을 마치면 색을 입히고 원하는 형태로 합성하기 위한 포토샵 작업이 이어진다. 사람을 담을 경우 부분을 나누어 찍는데, 때문에 간단한 포토샵 작업이라 할지라도 최소 50시간, 길게는 200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와인잔을 든 여성을 표현한 <좋은 날이야!>는 신체를 40군데로 나누어 각각 촬영한 후 포토샵으로 합성한 작품이다.

엑스레이 아트로 인생 2막을 열다

엑스레이 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18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아트페어를 포함한 단체전에는 100회 이상 참여했다. 8종의 미술 교과서에 내 작품이 실렸고, 과학 교과서에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내 작품이 소품으로 사용된 것도 작가로서 크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인생의 후반기에 엑스레이 아트를 시작했지만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가 맞아떨어져 어느덧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작가가 됐다. 사람의 능력은 다양하다. 경제적인 논리를 따져 자신의 능력에 미리 울타리를 치기보다 우선 시작하면 좋겠다. 과정을 즐기면서 하다 보면 결과는 따라온다. 이런 나의 생각은 <하루를 살아도 후회없이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에 담겨 있다.
나는 내년 8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엑스레이 아트 외에도 패션소품 디자인, 소라껍데기 스피커 제작, 별자리 관측 등 20가 지의 취미가 있어 퇴직 후의 시간도 심심할 새 없이 흘러갈 것 같다. 크로키, 스케치, 데생, 구도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엑스레이 기계를 구입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업하고 싶기도 하다.기계 자체가 워낙 고가인 데다 유지보수 비용도 상당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엑스레이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분야는 아니지만, 프랑스의 인상주의가 그랬듯이 언젠가는 제대로 인정받는 장르가 되리라 믿는다. 엑스레이 아트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후배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정리 윤현영
사진 제공 정태섭
*이 글은 정태섭 교수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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