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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2월호

천연염색활동가 조미숙 색이 주는 위안을 공유하다
조미숙은 천연염색가인 동시에, 색에 담긴 사회문화 코드와 색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고 색을 통해 다름을 이야기하는 티칭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색을 매개로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며, 색을 바탕으로 삶의 철학을 나누는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예술 활동이다.

예술가의 밥그릇 관련 이미지1 <길어올리다>, 설치-모시, 옥사에 소리쟁이, 망초, 쑥염색.
2 천연염색 수업을 함께한 학생들.

색에 대해 생각하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10분의 시간을 드리려고 한다. 10분 동안 알고 있는 색 이름, 일상생활에서 색을 표현하는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따로 정해진 정답은 없다.
자연염색을 이야기하는데 왜 색 이름을 쓰라고 하는지 이상한가? 자연염색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염색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된다. 염색이라는 말은 바로 자연염색을 보고 만들었을 테니까. ‘물들일 염(染)’은 물 수(水), 아홉 구(九),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염색이란 색을 물들이는 것인데, 물들인다는 것은 물이 필요하고, 나무로 대표되는 식물이 필요하고, 9번, 즉 여러 번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직접 물들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공장에서 만든 색을 선택만 하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연염색은 스스로 색을 만드는 작업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색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제 다 썼는가? 생각보다 10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 여러분이 쓴 색 이름, 색을 표현하는 말들을 읽어보자. 색 이름을 쓰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빨강, 노랑, 파랑’, 혹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시작한다. 교육을 통해 배운 3원색과 무지개의 일곱 빛깔이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색, 진달래색, 쪽색, 감색, 무지개색, 개나리색, 황토색…. 그럼 난 이렇게 질문한다. “하늘색은 어떤 색인가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연한 파란색이요, 크레파스에 있는 하늘색이요”라고 대답하면 조미숙나는 “그런가요?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색은 크레파스의 하늘색과 다른데요? 그럼 밤하늘은요?”이라며 반문한다. 하늘색이라는 색이 실제 하늘을 소외시킨다는 사실. 이런 식의 질문은 계속된다. “감색은 어떤 색인가요? 짙은 파란색일까요, 아니면 먹는 감색, 그것도 아니면 감물로 물들인 갈색일까요?” 같은 색 이름에 서로 다른 색깔들, 국방색, 카키색, 올리브그린색 등 특정 색이 시대에 따라, 트렌드에 따라 그 이름도 달라진다. 할머니가 꽃분홍색이라 불렀던 색이 손녀에게는 ‘핫핑크’가 된다. 우리가 시각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색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색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회문화적인 코드로 작용하는지를 생각해보자.

색을 통해 인생을 배우다

이제 자연염색을 시작해볼까.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천에 색을 물들이는 과정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색을 고르는 일과 많이 다르다. 천의 종류에 따라서, 중간 역할을 하는 매염제에 따라서 결과물이 달라진다. 이렇게 물들여진 천은 땀이 묻거나, 세탁을 하거나, 또는 햇빛 때문에 변색되거나 탈색될 수 있다. 바쁜 와중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힘들게 염색을 했는데 색이 변한다니, 굳이 자연염색을 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재료비에 인건비까지 따지면 답이 없는 작업이다.
난 이 일을 1997년에 시작해 만 20년째 해오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와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중 왕실의 장례 절차를 기록한 예장도감의궤의 복제사업에 참여하여 표장직물을 염색할 때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백일기도하는 마음으로 염색에 임했다. 복제 대상이 주는 심적 부담이 너무 컸지만, 일을 마친 후의 뿌듯함 또한 컸다. 홍화 꽃잎으로 전통 대홍색(大紅色)을 재현할 때는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상의원으로 가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염색한 물건이나 작품을 판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염색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부딪혔던 부분은 기존에 갖고 있던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하늘은 하늘색, 은행잎은 노란색, 단풍잎은 빨간색, 나무는 고동색으로 고정시켜놓았던 이미지들이 깨졌다. 그 어느 것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관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알고 있던 지식과 내 것이라고 여겼던 생각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색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자연이 내어준 색을 거둬들이면서 그동안 내가 고정관념과 허위의식에 눌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염색을 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하나둘 알게 되었고, 자연에서 위안을 받았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그래서 내가 배우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색을 달리 보도록 권유한다. 우리가 색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깨닫도록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나무 한 그루를 일주일에 한 번씩 관찰하고 색의 변화를 기록하게 하는 과제를 준다. 초등학생들에게는 그날 자신의 기분을 색으로 표현하게 하고, 그 색을 보고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의 기분을 짐작하게 한다. 또 자신 안에 어떤 색을 갖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빨간색을 염색하는 시간에는 자신이 경험한 빨간색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식이다. 때로는 눈물색, 엄마색, 사흘 굶은 시어머니 얼굴색 등을 상상하게 하기도 하고, 다양한 빛깔로 염색한 후에는 각각의 색에 이름을 지어주도록 한다. 이렇게 자신의 색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염색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고 변화에 순응하다

나는 옛 여인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보자기나 조각보도 사랑한다. 특히 조각보들을 보면 마음이 설레고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서양의 화가 몬드리안에 버금가는 조형성을 갖춘 예술품을 이름도 없는 옛 여인들이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옛 보자기에는 그것을 만든 여인들의 삶과 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쓸모없는 작은 천 조각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다해 이어 보자기라는 쓰임새를 갖도록 하는,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 색의 조각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연의 순리를 담아 이은 결을 발견할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결한 정신을 만나게 된다. 나는 과연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나는 아직 명함을 만들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천연염색가’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호칭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부담스럽다. 난 단지 천연염색을 통해, 때로는 전통 조각보를 통해 모두가 다르다는 것, 또 서로 달라도 괜찮다는 것,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소중한 자연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얼마 전 양평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지은 색 이름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한다. 포도색, 돼지색, 치즈색, 쌀색, 풍선껌색, 오래된 도화지색, 논색, 밤꽃색, 황소색, 바다고둥색, 까끌까끌한 색, 오디색, 덜 익은 복숭아색, 진시황색, 힘든 색, 쓸쓸한 색….

글·사진 조미숙_ 대학과 대학원에서 의류직물학을 공부했으며, 대학 및 여러 공간에서 천연염색과 보자기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색채와 염색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삶을 나누며 소통과 치유의 작업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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