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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9월호

책 <어려운 여자들>과 <폭스파이어> 이유 있는 분노
여성 혐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 같다. 적어도 문단 내부에서는 그렇다. 문단 내 성폭력 이슈가 지난해 하반기 거세게 몰아친 데 이어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문학평론가가 아닌 여성학자의 해설을 덧붙인 <82년생 김지영>은 시종일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의 어려움을 실증적으로, 통계학적으로 전한다. 그런 책이 과장을 보태자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분노의 크기를 목도하는 것 같다. 우리 주변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에 이토록 화가 나 있었나.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남성들이 스스로를, 반대편의 여성들을, 다시 한 번 살필 때는 아닌가.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의 소설집 <어려운 여자들>과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는 미국의 원로 소설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장편 <폭스파이어>는 그런 점에서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주제와 상관없이 소설 자체로도 어디 내놔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외국소설이 상수처럼 안고 있는 ‘번역 리스크’에서도 두 작품은 자유롭다. <어려운 여자들>의 역자는 이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의 번역자여서 신뢰가 가고, <폭스파이어>의 역자는 번역자이기 이전에 소설가다. 서걱거리거나 어색한 문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란히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두 소설의 빛깔은 사뭇 다르다. <어려운 여자들>이 억눌린 여성들의 거울상을 경유해 결국 그에 비친 남성들의 문제, 그러니 결국 인간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면, <폭스파이어>는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성장소설이면서 여성은 물론 인간 전체를 시장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읽힌다. <어려운 여자들>이 에로틱하다면 <폭스파이어>는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어려운 여자들>은 요즘 얘기, <폭스파이어>는 1990년대 시점에서 미국 사회에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를 회고하는 형식이지만, 인간 삶의 근본적인 구성원리랄까, 삶의 방식이 시대가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 않는 거라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지금 우리의 얘기, 너무 범위를 넓게 잡았다면, 21세기 미국 사회의 속살에 대한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보고서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

<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사이행성

록산 게이는 유명한 에세이집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에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로 규정했던 사람이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 행동 강령에 투철한 전투적 근본주의자와 달리 본성과 욕망의 부름에 솔직한 페미니스트를 뜻한다. 그런 좀 더 인간적인 관점이 소설집 전편에 깔려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려운 여자들>에 실린 단편들은 일방적으로 남성을 단죄하거나 과격하게 몰아붙이거나 하지 않는다. 물론 언제나 또 어디서나 남자가 말썽이다. 하지만 모든 남성이 모든 악의 근원인 것은 아니다. 오늘의 악당은 소년 시절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을 수도 있고, 한때 빛나는 청년이었으나 세월과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지금의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했을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언제나 오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어떤 단편을 펼쳐도 실망하지 않을 듯한데, 8쪽짜리 짧은 단편 <카인의 표식>은 쌍둥이 형제와 번갈아 사랑을 나누는 기묘한 여성, 9쪽에 걸친 <아기의 팔>은 여성 파이트 클럽에 다니며 골병을 자초하고, 동성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애인과의 절정의 순간을 들려주는 거친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공간, 공감 관련 이미지

분노의 연대는 가능할까?

<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자음과모음

<폭스파이어>는 미국 뉴욕주의 해먼드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한 10대 소녀 갱단의 이야기이다. 처음 5명으로 출발한 소녀 갱단 폭스파이어는 비슷한 연령대의 소년 갱단, 성인 남성 갱단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악행의 정도를 더해가며 세를 불린다. 일반적인 조직폭력배와 다른 점은 이들의 결성 목적이 단순한 악행이나 사익 추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피로 맺어진 진정한 자매들’이다. 각자 상처를 내 서로의 피를 섞는 피비린내 나는 입회 절차를 치르며 남성 전체에 대한 전쟁을 선언한다. 육체적으로 매혹적인, 그러나 변두리 낙제생 신분으로 집이나 학교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소녀들은 나쁜 남자들의 공격에 얼마나 무방비로 노출된 존재들인가.
소녀들의 극단적인 남성 증오의 원인이 무엇인지 소설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답은 자명하다. 소녀들은 한 조직원이 당한 성범죄를 공동의 치욕으로 받아들인다. 치밀하게 힘을 합쳐 처절하게 응징한다. 공동 주택을 마련해 일종의 자치 생활을 하는 데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다. 폭스파이어의 리더 ‘렉스’를 통해 전달된, 갱단의 이론가 격인 전직 가톨릭 신부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개개인은 결코 불의를 개선할 수 없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지구는 침묵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곱게 갈린 뼈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은 이렇게 페미니즘을 넘어 세상 전체의 고통에도 한 발 걸치고 있다.

글 신준봉_ 중앙일보 기자
사진 제공 사이행성,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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