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창작, 번역
지난 6월 15일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전날 작고한 한 번역가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주인공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레고리 라바사(Gregory Rabassa)라는 인물이다.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스페인 문학과 포르투갈어 문학을 전공한 후 20여년간 같은 대학에서 강의했고, 후에 뉴욕시립대학 퀸스칼리지로 자리를 옮겨 은퇴하기까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미국(영어권)에 소개한 번역가다. 그는 1967년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실험성이 강한 소설 <팔방치기놀이>를 번역해 그해 내셔널 어워드 번역상을 수상했고, 이후 가르시아 마르케스, 옥타비오 파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그의 번역 공로를 높이 평가하기 위해
굳이 말한다면 그의 번역 이후 이 작가들은 노벨상을 수상했다-, 브라질 현대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인 조르주 아마도의
소설, 스페인어권 독자와 연구자들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로
난해한 작품인 쿠바의 소설가 레사마 리마의 <천국> 등 라틴아메리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30여 년간 번역했다. 그 과정에서 1977년 펜 번역상, 1982년에는 번역 부문 펜·랄프만하임 메달, 2001년에는 그레고리 콜로바코스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그의 번역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예술 메달(National Medal of Arts)을 받았다.
그의 번역을 둘러싼 일화는 무수히 많지만 대표적으로
한 가지를 들자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친구인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조언을 받아들여 3년을 기다리며 자신의 소설<백년의 고독> 번역을 그에게 의뢰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족장의 가을> 등 다른 많은 소설도 그에게 번역을 의뢰했는데 마르케스는 그를 영어권의 가장 뛰어난 라틴아메리카 작가라고 평했다. 미국에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히스패닉이 많은데 그들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스페인어본보다 그레고리 라바사의 영역본을 선호한다고 한다. 미국 문단과 문학 연구자들이 ‘소설의 고갈’을 심각하게 논의하던 즈음 다시 ‘소설의 소생’을 이야기하게 하고, 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1960년대 이전에는 영어권 독자에게 거의 소개된 바가 없었고, 따라서 그 존재감이 없던 문학이다. 그레고리 라바사는 번역을 통해 생소한 외국 문학을 자연스럽게 미국 문학으로 만들어 미국 문학을 풍성하게 했다. <뉴욕타임스>는 부고기사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소설가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1960년대에 그들 문학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입구”였다고 그를 평가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가 생전에 받은 상과 메달과 훈장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미국에 잘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정부가 수여한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해 작품이 번역된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번역을 극찬하고 노고에 경의를 표했지만,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부고 기사는 스페인어권이나 포르투갈어권 언론의 기사보다는 미국과 미국의 통신(AP)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문학작품의 번역과 번역가 문제는 작품을 생산한 국가의 관심거리라기보다는 그것을 번역해 수용하는
언어권 독자들의 문제다.
번역, 송신자가 아닌 수신자의 과제
언제부터인가 한국문학의 과제 중 하나가 한국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되었다. 거기에서 만난 것이 번역이다. 한국문학 세계화의 1차 과제가 번역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번역에 대한 심각한 인식의 오류가 발생했다. 한국문학의 번역
문제가 한국문학이 짊어져야 하는 과제로 둔갑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한국문학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번역가가 많지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게 작동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문학은 우수하다’ 라는 자부심과 함께. 이러한 생각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을 때도 언론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문학은 우수한데 그동안 번역이 시원치 않아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작가 이상으로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를 조명했다. 이런 자세가 문제가 되는 것은 뒤에 더
논의하겠지만 왜 한국문학이 국제 진출을 해야 하고 교류를
해야 하는가 하는 목표 설정의 문제에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외국 문학을 번역 수용하는 우리 현실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보자. 현재 국내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많이 읽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대한 두 가지 번역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옛날, 이름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라만차의 어느 마을, 지금 그 마을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여하튼 얼마 전 그곳에…” 독자는 당장 궁금할 것이다. 화자는 그라만차 마을 이름을 잊었는가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가.
중학교를 마치면 누구나 원어로 암송하는 햄릿의 저 구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과연 원문에 맞는 번역인가. 이상하리만치 한국 독자가 사랑하는 미국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국내의 한 유명한 소설가가 번역한 것이 다른
번역본과 비교되면서 번역의 문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논란이 있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작품을 생산한 국가의 문예 기관이나 학자들이 상기한 한국어 번역본에
대해 잘된 번역이니 아니니 논의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올해 세르반테스 서거 400주기를 기념하는 다양한 문학 학술 행사가 세르반테스 인스티튜트를 주축으로 치러지지만 <돈키호테>에 대한 외국어 번역의 질을 논의하는 마당이 있다는 걸 필자는 알지 못한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를 맞는 영국의 브리티시 아트 카운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글로벌한 문학 번역 지원 프로그램, 특성화에서 스탠더드 방식으로
번역이 송신자의 문제가 아니라 수신자의 문제라는 것은 자국 도서의 외국어 번역 출판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명료해진다. 영국이나 미국을 제외한 유럽국가 대부분과 상당수의 아시아, 중남미 국가들이 자국 도서의 외국어 번역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문학작품의 외국어 번역 지원을 마치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으로
오해해 이를 비정상적인 임시방편의 제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이는 밖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도서의 숫자로만 보면 자국 도서 외국어 번역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은 도서를 지원하는 국가는 국제 출판시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독일과 프랑스다. 한국의 한국문학
외국어 번역 출판 지원 프로그램은 한국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프로그램이다.
단, 이런 글로벌한 프로그램을 한국에서는 우리만의 특수한 사정이 반영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은 지원 신청자가 제출한 샘플 번역의 질을 가장
중요한 지원 선정 기준으로 삼아왔다. 외국의 자국 도서 번역 지원 프로그램도 샘플 번역 심사를 통해 지원 여부를 결정할까. 필자가 조사한 20여 국가의 자국 도서 외국어 번역
출판 지원 프로그램은 공통적으로 번역의 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신청 서류에 샘플 번역은 없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이 요청하는 가장 중요한 서류는 도서의 출간에 전제되는 저작권 계약서 사본이다. 그리고 지원금은 번역가에게 직접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 도서를 번역·출판하고자 하는 외국 출판사에 준다. 단 지원금의 명목은 번역 지원금이며 번역가에게 지원되도록 조건을 단다. 사업의 검증은 책이 번역·출간된 후 한두 권을 납본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자국의 도서가 외국에 잘 수용될 수 있도록 번역을 진흥하기위한 지원 정책이지만 번역의 질에 대한 검증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수용되는 곳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다시 비교해
정리하면, 외국 지원 프로그램은 이미 번역 출판을 위한 저작권 계약이 이루어진 도서의 번역지원금을 해당 출판사에
지원하고, 우리는 아직 출판사가 정해지지 않은 한국문학 작품을 (샘플)번역 지원해 이 원고로 출판사를 섭외해가는 과정이다.
수용자의 것인 번역 문제를 송신자가 끌어안고 있어야하는 우리의 사정은, 앞서 언급했지만 신뢰할 만한 번역가가
많지 않고 또 한국문학 작품이 해외 출판 시장에서 활발하게
저작권 거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우수한 번역가가 나오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해외 출판사 담당자들에게 한국문학이 매력 있는 문학이라는 설득이 동반되어야 한다. 한국문학번역원은
2년 과정의 한국문학번역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젊은 원어민
번역가를 키워내고 있다. 이 새로운 젊은 번역가들이 이제
한국문학의 번역을 짊어질 것이다.
또한 작년부터 외국의 자국 도서 번역 지원 프로그램과
동일하게 해외 출판사가 한국문학 작품의 저작권을 계약하고 번역가를 선정해 지원 신청하는 경우 구체적으로 번역의
질을 평가하는 대신 원작의 작품성, 출판 계획의 타당성, 출판사의 위상 등을 판단해 지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번역원은 해외 출판사에 한국문학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이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 스스로 번역 출간하도록 유도하고있다. 시행 첫해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작품이 이런 방식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글로벌 스탠더드 방식으로 가는 것이다.
지금, 한국문학 세계화 과정의 새로운 단계
정부 차원에서 한국문학 세계화 사업이 시작된 이후 30여년간 우리는 끊임없이 번역에 집착했다. 그런데 이제 한강
작가의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은 한국문학의 국제 진출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문학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란 외국의 권위로부터 비롯된 인정-그 인정을 받고자 우리는 좋은 번역에 그리 매달렸다-은 다시 우리 문학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한국문학 연구자와 독자는
과연 출간된 지 10년 된 이른바 세계 3대 문학상 수상작을 어떻게 읽었고 평가했는가.
T.S. 엘리어트는 과거의 작품에 의해 구축된 예술 전통은 후대에 생산되는 작품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고 재편된다고 했다. 한국문학의 전통은 일차적으로 한국문학 연구자,
그리고 한국 독자에 의해 세워졌고 엘리어트의 주장대로 지금도 수정되고 재편되면서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그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문학의 가치 평가와 전통이었다. 이제 한국
문학은 외국의 권위라는 새로운 평가자와 만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문학의 국제 진출과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타자의 시각이 들어오면서, 한국문학에 대한 평가도 좀 더 넓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전통을 한국인만 구축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가 이 환경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한국문학은 한결 풍성해질 것이고 한국문학의 가치와 전통은 한국인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문학의 전통과 자산으로 확장될 것이다. 한국문학이 왜 국제적으로 널리 읽혀야 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올해 8월부터 문학진흥법이 시행된다. 한국문학을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서 떼어내어 체계적으로 진흥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는 기구를 두도록 법으로 정한, 한국문학에서 일대 사건이다. 이 법은 크게, ① 한국문학의 유산을 체계적으로 관리 보전, 연구하고, ② 당대 문학의 창작
활성화와 국민의 향유를 증진하며, ③ 한국문학의 유산과 성과를 해외 진출과 국제 교류를 통해 세계문학·독자와 공유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①을 위해 설립되는 기구가 국립한국문학관이고, ②를 위해서는 작가와 독자를 대상으로 예산을 동반한 다양한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이 실행될 것이며, ③을 위해 한국문학번역원이 한국문학의 국제 진출과 교류를 담당하게 된다. 그동안 한국문학에서 이 세가지 단계는 개별적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문학진흥법으로 한국문학의 국내 창작과 해외 진출을 하나의 논리선상에서 다루도록 하고 있다. 우수한 한국문학 작품이 생산되면 자연스럽게 해외 진출이 이루어지고, 해외에서의 평가는 다시 한국문학에 자양분으로 되
돌아올 것이다. 한국문학이 국제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려는 데 있어야 하고 한국문학의 사유와 지평이 전 지구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하기때문이다.
그레고리 라바사는 197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번역가가 펜을 들기 전에 이미 작가의 기량이 전쟁의 승패 절반을 좌우합니다. (중략) 원작이 좋은 경우 번역을 망치기 위해서는 번역가의 난도질이
필요하고, 작품이 위대하면 어릿광대가 번역해도 그 진가는
살아납니다.” 라바사가 아니었어도 라틴아메리카의 걸작은
누군가에 의해 영역되고 붐을 일으켰을 것이다. 전 유럽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소설은 붐을 일으켰고, 심지어 우리나라의
경우 적지 않은 작가와 독자들이 중역으로 출간된 <백년의
고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번역이 아무리 중요해도 한국문학의 국제 진출의 바탕은 ‘작품’이다.
- 글 고영일
-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출판본부장
- 사진 제공 한국문학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