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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역대 담당자에게
듣는 뒷이야기
- 만난 날
- 2023년 9월 5일 화요일
- 만난 곳
- 시민청
- 진행자
- 연재인(홍보마케팅팀)
입사 4년 차, 2022년 6월호(vol.184)부터 현재까지 [문화+서울]을 담당하고 있다.
- 참여자
- 최정필(서서울예술교육센터)
정경미(예술청팀)
이정연(금천예술공장)
김영민(서울연극센터)
2005년 1호부터 2023년 200호를 만들기까지, 서울문화재단에서 그간 열다섯 명 안팎의 담당자가 [문화+서울]을 거쳐갔다. 현재까지 재단에 재직하고 있는 옛 담당자를 모아 [문화+서울]이 거쳐온 변화와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봤다. 대담 참여자의 연차만 더해도 63년이라니, 그 역사가 더욱 실감 나는 듯하다.
[문화+서울]
담당자가 되다
최정필 제가 입사한 2007년에는 문화행정직 채용 시 트랙 구분이 있었어요. 서울문화재단은 당시 ‘도시 갤러리’라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저는 미술 분야로 입사했죠. 입사 직후엔 사업 부서에서 공공미술 관련 일을 조금 했는데, 얼마 안 가 홍보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미술·디자인을 전공했으니 재단의 디자인 총괄 업무를 맡으라는 거였죠. 그때가 정책지이자 반연간지였던 [문화+서울]의 첫 네 권을 펴낸 직후, 즉 월간지로 전환하는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한 번도 월간지를 만들어본 적 없는 담당자·부서·조직이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처음 발령받고는 영문도 모르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뛰어다닌 기억이 나네요.
정경미 저는 제가 원해서 [문화+서울] 업무를 맡았어요. 제가 발령 날 당시 홍보팀은 홍보·국제 교류·제휴·IT 등 다양한 업무를 하는 팀이었거든요. 그 안에서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업무가 월간지였어요. 당시 팀장님께 제가 [문화+서울]을 하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했죠.
이정연 저도 [문화+서울] 업무를 하고 싶어 홍보팀에 가겠다고 자원했어요.
김영민 [문화+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재단 입사를 준비하는 분들이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입사를 준비할 때 이 책을 열독했던 터라 한 번쯤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단에 들어오고 나서는 [문화+서울]이 경력이 많은 선배들만 하는 업무구나 싶었고, 홍보팀으로 이동하고 나서는 한동안 언론홍보 업무를 맡아야 했는데요. 홍보팀 인원이 줄어들며 제 입장에선 운이 좋게 [문화+서울]을 담당해볼 수 있게 됐네요.
김영민(서울연극센터)
입사 8년 차, 2020년 12월호(vol.166)부터 2022년
5월호(vol.183)까지 [문화+서울]을 이끌었다.
잡지의 얼굴,
표지와 판형
연재인 [문화+서울]은 창간호부터 4호까지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27.5센티미터의 크고 두꺼운 책이었다가, 5호부터 12호까지는 가로 19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의 작은 책이었습니다. 13호부터 지금까지는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27센티미터의 판형을 유지해오고 있고요. 표지만 봐도 전면 캘리그래피부터 시각예술 작품, 공연 사진까지 다양하게 바뀌어왔는데요. 각자 어떤 배경에서 이러한 표지와 판형을 택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최정필 제가 맡은 때가 판형이 가장 작을 때네요. 당시 디자이너가 이 판형을 고집하기도 했고, 아직 [문화+서울] 전용 예산이 편성되지 않았던 때라 여기저기서 끌어오는 바람에 판형이나 페이지 수는 예산 상황에 맞췄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웃음) 또 당시에는 이미지를 누끼따는 게 유행이었어요. 내지에 실린 사람 사진을 전부 누끼 작업해서 표지에도 얹었죠. 몇 호 발행하다 보니 시그니처 이미지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고, 이후부터는 내지와 관련 있으면서도 강력한 임팩트가 있는 사진 한 장을 표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정경미 제가 할 때는 시각예술 작품을 처음 표지로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재단 창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작품, 나중에는 신당창작아케이드·금천예술공장· 잠실창작스튜디오(현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 입주작가 포트폴리오까지 범위가 넓어졌죠.
이정연 저 때는 ‘표지=시각예술 작품’ 공식이 정착된 후였어요. 매 호 세 가지 표지 안을 가지고 대표님 보고를 올라가며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세 가지 안 모두 반려되기 일쑤였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대표님께서 담당자의 선택을 많이 지지해주셨어요.
김영민 저는 사실 처음 맡을 때 판형을 바꾸고 싶었거든요.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작고 가볍게 만들면 어떨까 해서 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절대 반대하시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지금 판형으로 계속 만들다가 어느 날 우연히 애독자를 만났는데요. 지금까지 [문화+서울]을 거의 다 모으셨는데 한 가지 크기로 정렬된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시는 걸 듣고 쉽게 판형을 바꾸면 안 되겠다고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정경미 지금 재단 본관 대표이사실 들어가는 벽면이 [문화+서울] 역대 표지로 꾸며져 있잖아요. 그렇게 전시처럼 꾸미기 시작한 때가 아마 조선희 대표님 시절이었을 거예요. 당시 대표님께서 ‘이 표지들이 담당자의 자랑스러운 얼굴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막상 벽면 조성할 때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대표이사실 갈 때마다 제가 담당한 표지를 찾아보게 되고 뿌듯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나오곤 해요.(웃음)
정경미(예술청팀)
입사 17년 차, 2011년 4월호(vol.50)부터 2012년
6월호(vol.64)까지 맡았다.
이정연 요즘도 연말에 12개 호를 모아서 아크릴 액자로 만들죠? 저는 [문화+서울] 업무가 너무 좋아서 각각 2개씩 추가 제작해 하나는 제가 갖고, 하나는 대행사 에디터님께 연말 선물로 드렸어요. 정말 애정이 많았네요.
정책지에서 정보지로,
시사지에서 기관지로
연재인 표지뿐만 아니라 [문화+서울]이 다루는 내용도 시기별로 조금씩 변화해왔죠. 첫 변화는 아무래도 반연간-정책지에서 월간- 정보지로 전환한 시기일 텐데, 어떤 필요에 의해 이러한 변화가 생겼나요?
정경미 그때가 저희 모두 입사하기 전이라 정확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화+서울]의 존재 이유가 조금씩 달랐던 것 같아요. 재단이 2004년 창립했는데, 2005년에 지금의 용두동 청사로 이사 왔다고 들었어요. 당시 해외 전문가와 행정 전문가를 불러 정책 세미나를 열었는데,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고 매체에 기록되길 원했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초반에는 상반기에 한 권, 하반기에 한 권 발행해서 서울의 문화예술 정책과 관련한 글을 많이 실었죠. 이후에 예술의전당 실무자로 계시던 안호상 대표님께서 2대 대표이사로 부임하시면서 [문화+서울]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재단의 사업이 조금 더 구체화하던 시기라 반연간지는 월간지로 바꾸고, 매달 수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정책 기사보다 우리 기관의 사업 홍보, 서울의 문화예술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로 채워나갔죠.
이정연 대표님이 취임하시면서는 문화예술 ‘시사지’로 매체 지향점이 변했습니다. 굵직한 일간지에서 기자로 일하시다 [씨네21] 편집장을 지내셨으니 잡지에 관해선 여느 직원보다 훨씬 더 전문가셨죠. 당시 대표님은 [문화+서울]이 기관지가 아닌, 일반 잡지와 견줄 수 있는 시사지가 되길 바라셨어요. 덕분에 담당자인 저도 시사에 계속 관심을 두고,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글을 쓸 수 있었죠. 신경숙 작가 표절 사건, 세월호 1주기 추모 공연 등을 다룬 기억이 나네요.
정경미 지금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나요?
연재인 현재는 ‘기관지’가 저희 정체성에 가장 부합한 것 같습니다. 전체의 60퍼센트 정도는 재단의 주요 사업 소식을 단신, 화보, 심층 기사, 인터뷰 등으로 전달하고 있고요. 그 밖의 40퍼센트는 해외 문화예술계 동향이나 예술가 인터뷰, 장르별 연재 칼럼 등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연재인 [문화+서울]을 만들면서 생긴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각자의 기억 하나씩 공유해주신다면요.
최정필 예술가와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게 제일 신기했어요. 저는 미술 전공이라 미술 분야 작가들의 성향은 경험해봤지만, 다른 장르는 잘 몰랐거든요. 유명 배우나 연출가가 인터뷰 자리에서 취하는 액션, 그들이 풍기던 카리스마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네요. 누구는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반말하고, 또 누구는 술 안 먹고는 인터뷰 안 되겠다고 하고, 하하.
최정필(서서울예술교육센터)
입사 17년 차, 반연간지에서 처음 월간지로 바뀌었던 2007년
7월호(vol.5)부터 2008년 2월호(vol.12)까지 담당했다.
정경미 저는 마감에 쫓기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월간지는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일정에 내 삶을 맡겨야 하는 업무죠. 한번은 어떤 필자에게 인터뷰 원고를 맡긴 적이 있는데, 마감 날도 훌쩍 넘기고 결국 인쇄 직전까지 원고를 안 주는 거예요. 전화해도 처음엔 알겠다고 해놓곤 나중에는 잠수 타고…. 그런 와중에 태연하게 다른 행사에 나타나고. 화가 정말 머리끝까지 났죠. 둘째 임신 중이어서 애가 오늘 나오네 내일 나오네 하던 때였는데, 결국 새벽 네 시 반에 원고를 넘겨받아 사무실에서 교정 보고 오전 여섯 시 반에 퀵으로 교정지를 보낸 기억이 있네요. 당시 팀장님은 여차하면 그 기사 빼버리라고 나름의 위로를 해주셨는데, 한두 페이지도 아니고 여섯 페이지를 어떻게 한꺼번에 빼냐고요! 정말 식은땀 났죠.
좋은 쪽으로 기억나는 건 송현민 평론가예요. 당시 송 평론가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메일을 한 통 보냈더라고요. 국악 평론을 하는 사람인데 [문화+서울]에 글을 싣고 싶다면서요. 때마침 국악 분야의 필진을 찾고 있었고, 그 당시에도 워낙 글이 좋아서 믿고 맡겼죠. 어느새 보니 엄청 유명한 평론가가 되셨더라고요. 몇 년 전 재단 사업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반갑게 인사해주셔서 고마웠어요. 저를 못 알아볼 줄 알았거든요. 그때도 되게 성실하고 글 잘 써주셨던 걸로 기억해요. 마감일도 물론 잘 지키셨고….(웃음)
최정필 초창기에는 필자 섭외하는 게 어려웠죠. 지금이야 [문화+서울]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처음에는 우리가 뭐 하는 곳인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연재인 이정연 매니저님은 기억에 남는 경험이나 애환이 있으신가요?
이정연 잊고 있었는데 제가 [문화+서울] 100호를 만들었더라고요. 오늘 이 자리 와서 생각났어요. 책을 들춰보니 그때 생각이 많이 나네요. 저는 국문학 전공인데 조선희 대표님을 대학 시절부터 선망해왔어요. [씨네21]을 늘 갖고 다녔거든요. 그런 분이 대표님으로 오신다고 하셔서, 또 때마침 제가 [문화+서울]을 맡고 있어서 잔뜩 긴장했죠. 그래서인지 가장 뿌듯하고 기억에 남는 순간도 대표님께 건너건너 칭찬 들었을 때예요. [문화+서울]을 맡고 시간이 좀 흐른 뒤에 간부회의에서 저희 팀장님께 칭찬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정연이 [문화+서울]을 잘 만들고 있다’고. 그 얘기를 전해 듣곤 며칠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녔네요.(웃음) 팬으로서 존경해온 분께 인정받는 기분이랄까요.
[문화+서울]
200호를 넘어
연재인 과거 이야기를 한참 했네요.(웃음) 각자의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면서 [문화+서울] 200호에 축하와 조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영민 이번 대담 덕분에 돌아봤는데 제가 18개 호를 만들었더라고요.
정경미 많이 했다.
김영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재단에 입사하기 전부터, 어쩌면 재단보다 [문화+서울]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는데요. 중간에 종이 잡지를 폐간하고 웹진으로 완전히 전환하는 걸 고려해보라는 압박이 있었을 때는 정말 막고 싶었어요. 물성이 없는 [문화+서울]은 왠지 [문화+서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한때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졸지에 휴·폐간 없이 꾸준히 지속해온 얼마 안 되는 기관지가 되어 있더라고요. 또 재단 사업들이 워낙 빠르게 생기고 없어지곤 하는데 [문화+서울]은 재단 창립 이듬해인 2005년부터 지금까지 18년 넘게 이어온 사업이에요. 재단 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업 중 하나라는 의미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버’가 답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어요.(웃음) 이제는 [문화+서울]이 ‘존버’만 잘하면 될 것 같아요. 힘들더라도, 앞으로도 잘 버텨서 좋은 잡지가 꾸준히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정경미 [문화+서울]이 참 기특한 녀석이네요. 우리가 300호를 축하하는 자리에서도 꼭 다시 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문화+서울]을 담당할 당시 큰애는 재단 건너편 어린이집에 다니고, 작은애를 임신 중이었거든요. 교정을 보는 시즌에는 야근이 필수라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를 회사 동료들이 데리고 와줬어요. 그러면 한편에서는 아이에게 치킨 사 먹이며 놀아주고, 한편에서는 제가 업무를 봤죠. 회사 다니면서 동료들에게 육아 도움을 받기 쉽지 않은데, 그렇게 만들어온 잡지라 그런지 애착이 더욱 큽니다. 대표이사실 앞 벽면을 지나칠 때 후배들에게 ‘내가 이거 이거 만들었다’ 얘기하는 것도 기분이 좋고요. 벌써 벽이 가득 찼던데, 새로운 벽을 찾아 가득 채울 때까지 [문화+서울]이 무사히 잘 있어줬으면 좋겠네요.
이정연 예나 지금이나 [문화+서울]을 단순 ‘기관지’라고 하면 아쉬움을 느끼는 분들이 많으세요. 담당자도 생각이 많을 것 같고요.(웃음) 그런데 이제는 기관지라는 말을 부정적인 프레임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예전의 서울문화재단과 지금의 서울문화재단은 분명 다르거든요. BTS의 팬덤 이름인 ‘아미’가 ‘대중’을 뜻하게 된 것처럼, 서울문화재단이 하는 일만 잘 담아도 문화예술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관이 문화예술의 전 영역을 다루고 있기도 하고, 문화예술 관련해 선도적으로 이슈나 의제를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기관지를 표방하더라도, 우리 자체가 문화예술이라는 자부심으로 기관지를 꾸준히 유지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이정연(금천예술공장)
입사 17년 차, 2014년 6월호(vol.88)부터 2016년
4월호(vol.110)까지 담당했으며, 100호 기념 호를 진행했다.
최정필 저에게 [문화+서울]은 문화예술의 얼굴이자 인상입니다. 우리 재단이 서울 문화예술의 흐름을 선도하는 공공기관인 만큼 우리 재단이 내는 기관지는 문화예술계의 얼굴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서울의 미래, 문화예술의 미래를 담은 얼굴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이정연 이 분위기에서 지금 담당자의 심정은 어떤가요.(웃음)
연재인 저는 비교적 최근에 입사해서인지 처음 업무를 맡은 순간부터 [문화+서울]이 늘 위기에 닥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문화+서울]의 미래에 대해 웹진 전환, 계간 전환, 폐간 등 다양한 얘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00호까지 나온 게 기특하다는 마음이 제일 큽니다. 사실 제가 200호를 내는 순간에 [문화+서울]을 맡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요. 우연히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름을 한 줄 더 남기게 됐으니, 제가 맡는 한 또 열심히 만들어나가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하게 됩니다. 오늘, [문화+서울]이 걸어온 길에 대해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잡지를 낼 수 있도록 선배님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