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2인칭의 섬세함
초록빛 머금은 문화예술계
한국에서 식물 기르는 일은 중·노년층의 취미로 많이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좀 다르다. 젊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식물을 찾고, 이른바 ‘핫플레이스’라고 하는 카페는 식물을 적극적으로 인테리어에 활용한다. 심지어 거의 식물원에 가깝게 꾸며놓은 카페도 본 적이 있다. 식물 기르기는 이제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는 ‘힙한’ 취미다.
‘플랜테리어Planterior’는 식물 트렌드를 반영하는 신조어다. 식물을 인테리어로 활용하면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플랜테리어는 코로나19 이후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안전한 취미를 찾던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었고, 사람들이 서로 ‘거리 두기’하는 만큼 식물과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다. 식물은 전보다 더 많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식물의 반려 인간으로서, 식물을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생각하고 들이는 행동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사실 식물과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든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과는 아예 다른 층위에서 고도의 섬세함이 요구된다. 식물은 소리나 움직임보다 형태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반려 인간에게는 잎의 두께와 색깔을 관찰하는 능력과 더불어 흙의 굳기, 화분 주변의 온도와 습도 등을 매일 살피는 성실함까지 필요하다. ‘식물 집사’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정적이며 치열한 식물의 생
그래서일까, 식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오래 이어질수록 식물은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 문화예술계 많은 작품은 식물을 단지 하나의 소재나 소품을 넘어, 그 자체로 주인공으로 표현하고 있다. 식물은 물론 예쁘고 귀엽지만, 그런 층위를 넘어서 사람을 고민하도록 만들곤 한다. 문화예술계가 이렇게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테다.
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술 작품이나 전시, 혹은 식물 집사가 쓴 에세이가 대부분 강조하는 것은 식물의 아름다움이나 식물이 ‘나’에게 주는 위로가 아니라, 식물과 인간이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이다. 식물 집사들의 에세이는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로 시작해서 각 식물과 조금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분투를 보여주곤 한다. 그 과정에서 식물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처럼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평화롭지만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필자는 이것이 식물을 ‘기르는’ 사람이 아닌 식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식물을 기르는 사람은 보통 식물을 기르면서 느끼는 보람이나 위로, 혹은 식물의 매력을 많이 언급한다. 필자는 이것을 1인칭과 3인칭의 사고라고 여긴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에 1인칭, 관찰자로서 식물을 서술하기에 3인칭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랜테리어는 1인칭과 3인칭으로 식물을 대하는 일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일은 2인칭이다. 식물을 ‘너’ 혹은 ‘당신’의 위치에, ‘나’를 식물의 입장에서 ‘당신’의 위치에 두는 일이다. 그래서 식물과 함께 사는 사람은 식물의 모습이나 작은 변화에 더 집중한다. 보람이나 위로도 물론 느끼지만, 그 조용한 생들을 책임지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민과 걱정이 많아진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비슷하게 ‘너랑 잘 지내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허리 숙여 ‘너’와 함께 살아간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문화예술계의 초록 바람은 식물을 2인칭의 존재로 대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희망을 주는 듯하다. 허리를 숙이고 흙을 만지며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식물이 단지 ‘나의 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나’와 관계 맺는 ‘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려 식물의 종류·크기·건강이 반려 인간의 삶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이유다.
2인칭으로서의 식물과 일상을 함께하면서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섬세함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규칙만을 따르면서는 예민한 식물과 함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느낌이라는 1인칭과 상식이라는 3인칭을 벗어나서 도무지 말이 없는 식물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길러지는 것은 큰 소리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나’와는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듯한 존재에게 말을 건네면서 그에 맞는 관계를 고민하면서 생겨나는 2인칭의 섬세함 일 테다.
필자는 식물과 살아가면서 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고, 손바닥만 한 작은 생명과 함께하는 일도 꽤 많은 책임을 수반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배움은 이 푸른 존재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양상이 필자의 욕심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존재가 그렇듯, 식물도 우리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글 안희제 《비마이너》 칼럼니스트, 《식물의 시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