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불안의 증언, 그리고 카타르시스
두려운 현실을 그리는 화가들
생각해 보면 ‘공포’는 계절과 상관없이 주변에 널려 있다.
귀신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공포스러운 현상은 현실에 항상 있었다. 안전한 이불 밖 두려운 현실을 포착한 화가는
보이지 않는 낌새를 추적해 우리에게 현실의 ‘공포’를 보여준다.
1 김덕훈 <interview> | 종이에 흑연 | 130×175cm | 2019
2 안창홍 <봄날은 간다3> | 패널에 사진 콜라주, 잉크, 먹 | 104×156cm | 2007
3 이동혁 <게으른 술래2> | 캔버스에 유채 | 112×145.5cm | 2018
4 이은새 <나이트 스쿼드> | 캔버스에 오일 | 53×45.5cm | 2017
시각예술인 미술은 현실의 공포를 어떻게 다뤄왔을까. 과거 화가들은 ‘공포의 시대’에 ‘공포의 이미지’를 그려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현실의 상황을 환기했다. 죽음과 내세의 공포 외에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14세기 이후, 그림은 다양한 공포 감정을 이미지로 구체화해 보여줬다. 15~16세기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그림이나 20세기 개인의 불안정한 감정을 드러내는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등이 대표 예다.
결국 예술이 보여주는 공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러한 현실의 공포 상황은 예술 작품으로 드러나고, 우리로 하여금 이에 대해 환기하게 하고, 결국 마음의 정화와 치유로 이어진다. 공포가 주는 아이러니한 예술적 카타르시스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고통스러운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상쾌해지는 흐름이라고 할까?
보이지 않는 공포의 낌새를 감지하다
현재도 여전히 예술가는 이 시대의 공포를 증언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징후를 드러낸다. 현대사회의 공포와 불안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전쟁이나 역병뿐만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불합리성, 시스템과 개인 간의 불일치에 대한 반영, 혹은 각박한 사회에서 가라앉고 있는 개인의 마음일 수도 있다. 국내 여러 작가 또한 다양하게 드러나는 공포 상황을 자신의 작품으로 표출한다.
안창홍의 <봄날은 간다>는 1995년부터 진행해 온 연작이다. 참혹한 6·25전쟁 당시에도 아름다운 봄날은 오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슬픈 감정을 노래한 가수 백설희의 가요 제목을 땄다. 이 연작에서 안창홍은 군사독재 시절에 자행된 사회적 폭력으로 초래된 개인의 자유와 일상의 파괴 등을 은유적으로 보여줬다. 특히 행사나 가족의 기념사진 등을 변형해 사회적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드러내는데, 이미지가 기괴하다. 입학이나 졸업을 기념하는 사진에서 지워진 사람들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가 품은 일종의 무언의 공포를 드러낸다. 눈이 없거나 눈을 감은 사람들과 얼굴을 덮는 벌레나 나비 등은 사라진 사람들과 죽음을 표상한다. 작업을 통해 안창홍은 왜곡된 사회시스템이 드러내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증언하고 경고한다.
이에 견주어 이은새가 보여주는 공포는 경쾌하다. 이은새는 <밤의 괴물들>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이 느끼는 불안함·공포감을 주체적으로 꾀하는 일탈로 바꿔버린다. 밤의 귀갓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술을 먹고 스스로 ‘밤의 괴물’이 돼 유쾌하면서도 기괴한 공포를 감상자에게 드러낸다. 특히 이은새가 행하는 경쾌한 붓질과 원색의 색감은 이러한 공포를 더욱 자극적으로 강조한다.
필자가 김덕훈의 <유령Spectre> 연작을 처음 봤을 때는 꽤 섬뜩했다. 김덕훈은 여러 영화 장면을 포착해 캔버스에 ‘박제해’ 버렸다. 연필로 세 밀하게 그린 검은 톤의 그림은 눈동자가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이 불길함을 드러낸다. 과거 조지 오웰의 《1984》처럼 통제되는 사회시스템의 비인간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는 영화의 사소한 장면을 포착한 이 작업을 통해 사라진 기억과 잊힌 존재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불안정한 기억과 망각의 세계를 눈동자가 없는 조각상처럼 육중하면서도 비인간적 인물상으로 확인받고자 한다.
이동혁은 믿음과 불신, 그 간격에 대한 거리를 어두운 화풍으로 보여 준다. 이동혁이 표현하는 화면 속 풍경 혹은 대상이 독특하다. 공포영화에서나 봄직한 폐교회의 공간을 직접 찾아가고, 그 분위기를 직접 체화한 결과물 혹은 기운을 화폭에 담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 작품을 접하고는 단순히 어두운 분위기의 풍경화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작업 방식을 알고 난 후에는 화면이 좀 더 음습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현대의 종교에 대한 생각, 신성 문제,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폐교회의 풍경을 통해 고민한다.
지난해 불어닥친 역병 또한 미술가에게는 공포의 소재다. 해외의 경우 그라피티 작가들이 등장인물에 마스크를 덧입히거나 세계 명화의 인물에 마스크를 씌우면서 ‘팬데믹’의 공포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시각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이렇듯 현대를 관통하면서 미술가들은 시대가 드러내는 공포, 내면의 불안 등을 표출해 왔다. 그리고 그 공포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보는 이에게 내면과 정신의 변화를 새로이 불러일으킨다. 예술 작품을 통해 공포를 경험하고 이를 통한 카타르시스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것, 이 시대에 예술이 주는 큰 미덕이 아닐까.
글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 사진 제공 김덕훈, 안창홍, 이동혁, 이은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