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음을 듣는 방법
시니어에 대한 존경과 연대의 콘텐츠
배우 윤여정의 잇따른 해외 영화제 수상에 힘입어 ‘K할머니’ ‘할매니얼’ 등이 마케팅 용어로 등장하고 대중매체 역시 노인 세대를 찾기 시작했지만, 필자는 그 환대가 조금은 수상하고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사람이라면 ‘나는 늙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고, 대다수의 콘텐츠는 그 시기를 기념하며 만들어지기에, 노인 세대와 그들의 삶을 조명하려는 관심 또한 젊음의 관점에서 멋대로 해석되며 빠르게 소모될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목소리를 낼 기회를 잡은 노인들은 그런 의구심을 개의치 않으며 세상의 부름에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답했다. ‘말 없는 지혜’ 안에 노인을 가두고, ‘말하는 지혜’로 노인을 불러내던 젊은이들은 그 겸허함을 통해 감히 그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려던 태도를 거두고, 세대 간의 선을 지우며 노인이 돼가는 방법을 배운다. ‘스낵’에서 그들을 향한 존경과 연대를 담은 콘텐츠를 소개한다.
조율의 시간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이종열 피아노 조율사
2019년 출간된 에세이 《조율의 시간》은 한 가지일에 오랜시간 노력을 쏟아온 사람의 치열한 시간이 고스란히 기록된 책이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이종열 조율사를 초대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그의 목소리를 유도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내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제목을 붙일것인가?”란 유재석의 질문에 명장이 “이제 겨우 쓸만한데 80이네”라 답한 것인데,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콘텐츠의 형식을 무너뜨리는 이찰나의 순간은 시니어에게 직접적인 조언을 구하기보단 그들의 위트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읽으려는 요즘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나의 할머니에게
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김유라 크리에이터
“오래 어두운 것들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경이롭습니다.” 백은선의 시 <해피엔드>의 한 구절은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한 채 늙어가는 두려움을 삼키게 만든다. 박막례 할머니의 손녀인 김유라는 치매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할머니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고, 여행을 가고, 요리를 하고, 춤을 추는 나의 할머니를.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할머니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만드는 이 ‘효도 콘텐츠’는 세파에 시달려온 한 여성의 칠십 평생을 담고, 그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효과적으로 말하며 사람들에게 기꺼운 용기를 심어준다.
나비처럼
tvN 드라마 <나빌레라>
한동화 PD·이은미 작가
한동화 연출, 이은미 극본의 <나빌레라>는 일흔에 발레를 시작한 덕출(박인환)과 방황하는 20대 무용수 채록(송강)의 성장 드라마다. 덕출은 매회 채록을 독려하고 용기를 주는 기성드라마속 ‘어른’의 역할을 해냄과 동시에, 경증 치매를 앓게 된 늦은 나이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을 통해 노년의 삶을 주인공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런 덕출의 ‘성장기’는 “성실한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하며 조연과 주연을 가리지 않고 활약하는 배우 박인환의 모습과 겹쳐진다. 일흔의 발레리노를 연기한 박인환은 여느때와 같이 노련한 연기력을 보여주지만, 무용이라는 장르에 도전하는 데서 오는 긴장감을 내비치 기도하는데, <나빌레라>는 바로 이순간을 포착하는작품이다.
세상에서 지워진 소리
영화 <이태원>
강유가람 감독
강유가람 감독의 영화 <이태원>은 1970년대 기지촌이었던 이태원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착한 세 여성 삼숙·니키·영화의 이야기를다룬다. 재개발·불황·쪽방생활·불안정한 소득 등 영화가 비추는 도시 곳곳의 풍경은 세노년 여성의 질곡많은 과거와 불안한 오늘을 짐작하게한다. 강유가람 감독은 노인이자 빈곤층, 여성이자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급인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드라마를 입히거나 관점의 거리를 만드는 대신, 그저 이들이 사는 세상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임을 이야기하고 자한다. 다수의 평온을 위해 거칠게 몰아내고 지워낸 묵음같은 소리가 시끄럽게 드러날때, 비로소 내가 사는 세상 또한 확장된다는것을 말하며.
글 복길 칼럼니스트 | 사진 tvN, 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KT&G 상상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