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미래 시나리오 상상하기
낯선 듯 익숙한 현실과 가상의 만남
예술의 시초로 불리는 동굴벽화, 원근법 적용으로 3차원의 입체감이 살아 있는 폼페이 벽화 등 모두 인류가 현실에 가상의 상상력을 더해 재현한 대표적 예술 창작 성과다. 나아가 이제는 기술 발전으로 상상에서 존재하던 가상 세계가 손에 잡힐 듯 실체화되는 놀라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 가상공간 개념 고찰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의 메모리로부터 추출된 데이터를 그래픽으로 표현한 것. 상상을 뛰어넘는 복잡성. 인간의 정신이라는 비공간에 펼쳐진 빛나는 선들과 별자리처럼 빛나는 데이터의 무리.”
이 문구는 미국 SF소설가 윌리엄 깁슨William F. Gibson이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가상공간Cyberspace 개념을 최초로 묘사한 내용이다. 깁슨은 컴퓨터와 네트워크상에서 시각화된 수많은 데이터가 표현된 상태를 가상공간으로 정의하며 이에 대한 논의와 상상력을 촉발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물리적 현실과 가상세계 간의 만남과 연결이다. 폴 밀그램Paul Milgram 토론토대 교수는 가상부터 현실의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가상-현실 연속체Virtual-Reality Continuum’ 모델을 발표했다. 현실부터 가상까지 네 가지 단계별 유형을 제시하며(현실-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증강가상Augmented Virtuality, AV-가상) 이를 총망라한 상태를 혼합현실Mixed Reality, MR로 정의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를 모두 포괄하는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 개념이 자주 사용되는데, 가격과 접근성이 대폭 개선된 실감형 기술(VR·AR·XR) 디바이스·네트워크·디지털 플랫폼의 연계 활용으로 몰입감 있는 가상현실 체험 기회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가상공간 발전의 연장선상에서 메타버스Metaverse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서 처음 소개된 개념으로,‘메타Meta, 초월’와 ‘유니버스Universe, 세계’의 합성어다. 현실정보의 맥락을 보존하며 이뤄진 3차원 디지털 세상을 뜻한다. 최근 세계 문화예술 축제에서도 메타버스 플랫폼의 활용 사례가 두드러지는데, 프랑스 칸영화제 ‘칸 XR가상 오디토리움’과 미국 선댄스영화제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 부문 메타버스 플랫폼이 대표적 예다. 이들 플랫폼에서는 물리적 만남이 어려워진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참가자가 아바타로 온라인 가상공간 속 상영관을 방문해 VR 또는 온라인 작품을 감상하고 전 세계 참여자들과 만날 기회를 제공했다.
국내외 XR 기술 및 정책 동향
XR 관련 미래 청사진은 일례로 영국연구혁신기구UK Research and Innovation의 ‘미래의 관객Audience of the Future’ 지원 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중 대표 성과로 올해 3월 영국 로열셰익스피어 극단Royal Shakespeare Company의 온라인 인터랙티브 공연 <꿈Dream>이 올랐다. 접속 관객은 3차원 공간의 배우 아바타에게 반딧불이를 날리며 상호적 체험을 했고, 매회 전 세계 수천 명 관객이 참여해 열기를 더했다. 국내에서도 XR 연계 경제 견인을 목표로 ‘가상융합경제 발전전략(20.12)’ 정책을추진하고 있다. 다만 XR을 활용한 이음매 없이 몰입감 있는 예술 작품이 드문 국내 상황을 볼 때, XR 활용 예술 창작 지원정책을 지속 강화해 나갈 필요성이 있다.
가상공간과 예술, 그리고 미래 시나리오의 중요성
코로나19 때문에 지친 일상에 즐거움과 위로를 건네주는 예술의 본연적·사회적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예술의 역할 증진을 위한 예술정책의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한층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때에 가상공간을 만드는 XR 기술과 예술 융합 지원정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화려한 첨단기술에만 매몰되지 않고 상호 연결 및 소통, 무한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갖는 가상공간의 개념적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개념·시각을 중심으로 주제를 구축한 후 기술을 바라보고, 예술 창작에 기술을 창의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지원 방향 수립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아가 가상공간 활용 예술의 미래 시나리오를 다각적으로 그려볼 필요도 있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창조적 몰입형 산업’에 대한 미래 전망에서 향후 3~5년에 대한 3개 시나리오(긍정·부정·중립)를 제시했다. 이는 다양한 대안적 방향의 고려가 선행될 때, 이를 발판 삼아 선호하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시대) 우리에게는 정말 필사적으로 새로운 대본들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에게 인식의 지도 그리기를 건네줄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들, 우리가 어디로 향할지 그려줄 현실적이면서도 파국적이지 않은 의미가 담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얘기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메시지를 되새기며, 가상공간을 활용한 놀랍고 감동적인 미래 예술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떠올려본다.
글 한하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영전략본부 정책혁신부 주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