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 박문치
문을 열고 작업실에 들어서자, 정면에 붙어 있는 세기말 포즈의 전지현 브로마이드가 눈에 들어온다. 2000년에 발간된 연예 잡지의 부록이다. 다른 벽엔 가수 R.ef의 포스터가 붙어 있지 않나, LP판이 놓여 있지 않나. 마치 과거로 온 듯하다. 하지만 최신 맥북과 신시사이저가 중심을 차지한 걸 보니 이곳은 2019년의 음악 작업실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누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있는 걸까.
규정할 수 없는 뮤지션
뮤지션 박문치.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룹인지 솔로인지 정체 모를 이름이다. 음악은 또 어떤가. 1990년대 음악인가 싶지만, 최근 발표된 곡이다. 과거에 활동했던 뮤지션인가 싶지만, 그는 1996년생이다. 이 모든 상반된 요소들을 품고 있는 박문치는 혼자 활동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2017년 디지털 싱글 앨범 <울희액이>로 데뷔한 후 <널 좋아하고 있어>, <네 손을 잡고 싶어> 등 개인 싱글 앨범을 냈으며 다른 여성 뮤지션들과 함께 싱글 <Summer Love…>를 발표했다. 개인 앨범도 그렇지만 핑클을 이을 걸그룹이라 할 만한 ‘치스비치’의 앨범 커버는 충격적이면서도 낯익고 재미있다. 20~30년 전의 음반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담긴 음악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히트한 음악을 다시 듣는 듯 낯익고 정겹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감각적이다. 그는 개인 음반 작업 외에도, 정준일과 린 등의 뮤지션들을 위해 작곡 및 편곡 작업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튜브에 음악과 관련된, 가끔은 음악과 관련 없는 콘텐츠를 올리고 있다.
지금 사람들이 박문치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뉴트로 스타일의 음악 때문이다. 올드팝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에, 박문치는 어릴 적부터 옛날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다. 하지만 과거 음악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현재의 음악에 식상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중2병’ 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차트에 있는 음악이 다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옛날 음악을 찾아 들었더니, 오히려 완성도가 높고 좋더라. 내가 꽂혀 있는 곡들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내가 만든 곡들을 듣고 사람들이 레트로라고 하더라. 재미있어서 시작했는데, 이후엔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하게 됐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구가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욕구로 바뀐 셈이다.
그가 옛날 음악에서 느낀 매력은 뭘까. “요즘 음악은 일단 멋있다. 듣기에도 편하다. 보컬 실력도 좋고 튜닝도 잘돼 있다. 너무 잘 다듬어져서 기계 같은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에 반해, 옛날 음악은 어렵고 센 편이다. 듣기 불편하기도 하다. 음정이 불안하고 박자가 안 맞는 듯이 느껴지는데도, 그게 오히려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멜로디나 가사를 들어보면 예쁘면서도 순수함이 느껴지고.” 그래서일까. 박문치의 음악도 재고 따진 느낌이 없다. 다듬어지지 않은, 독특한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저 재미있게 만든 것 같고, 듣는 이를 즐겁게 한다.
1 박문치의 프로필 이미지.
2 <네 손을 잡고 싶어> 앨범 커버 이미지.
뉴트로 그 자체
박문치의 작업 방식도 뉴트로 스타일이다. 작곡과 편곡, 보컬, 연주뿐만 아니라, 음반 커버 및 뮤직비디오 촬영과 편집, 공연 연출까지 모두 도맡아 한다. 그의 활동을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은 소셜미디어다. 일상과 일이 구별되지 않는 삶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래된 가내수공업 형태 같지만, 이미지 촬영과 편집, 공유는 요즘 세대의 대표적인 방식으로 한다. 어쩌다 뉴트로 음악을 선도하고 있는 그 또한 요즘 뉴트로의 열풍을 체감하고 있다. “예전에 내 음악을 듣고 ‘너도 요즘 음악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걱정하던 친구들이 요즘엔 레트로 음악을 하려고 하더라. 최근 내가 의뢰받는 일들도 주로 그런 것들이고. 나도 좋아서 찾아 듣지만, 유튜브에 올라온 옛날 명곡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리는 걸 보면 신기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업실 자체가 뉴트로 집합체다. 뉴트로 음악이 탄생하는 최신 컴퓨터와 악기 옆에 장난감 같은 오래된 아날로그 신시사이저가 놓여 있다. 옛날 음반과 소품 등이 작업실에 독특한 분위기를 더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즐겨 찾았다는 동묘와 광장시장의 느낌이 나는 패션을 하고 있다. 레트로 음악을 한다고 하니 진한 옛날 감성을 지닌 애늙은이일 것 같지만, 생각과 태도는 딱 요즘 애들 같다.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있고 재미있게 산다. “음악으로 유명해져야겠다는 욕심도 없고, 부와 명예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도 싫다. 그냥 행복하게 음악을 하고 싶다. 이런 음악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게 조금 걱정이지만, 아직 발표되지 않은 곡도 있고 다른 가수들과 작업할 땐 다양한 음악을 한다. 아직 보여줄 게 많으니,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스스로도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하는 작업이 좋다는 박문치. “뭔가 수상하고 병맛인데, 멋있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는 최근 KIRIN(기린)의 <버스 안에서>를 발표했고, 내년에는 주위의 매력적인 여성 보컬들과 함께 ‘여성 디바 스페셜 앨범’을 내는 게 목표다.
- 글 이민선_자유기고가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박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