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뉴트로 총집합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새로운 복고’라 명했던 뉴트로는 음악, 영화, 디자인 등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2019년의 가장 힙(hip)한 트렌드가 되었다. 기존에 유행했던 복고와 다른 점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며 구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추억을 파는 것이 아니라, 1020세대들이 낡고 촌스러운 옛것에서 매력과 가치를 찾아내 그 희소성을 즐긴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한 적 없는 디지털 세대에게 그때 그 시절의 문화는 참신하게 다가온다. 뉴트로 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대는 1990년대에 등장한 ‘X세대’이다.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하고 기성세대에 반항한 X세대들이 40대에 접어들면서 문화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과거에 누렸던 혹은 현재에 재생산한 콘텐츠에 젊은 세대들이 환호하는 것이다.
1 제이홉 싱글 <치킨 누들 수프> 아트워크.
2 이동기 작가의 전시 포스터.(출처_피비갤러리 누리집)
뉴트로 감성 작가
최근 서울 피비갤러리에서 열린 이동기 작가의 개인전 <1993~ 2014: Back to the future>(9월 5일~11월 2일)에서는 <아기공룡 둘리>,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 잡지나 광고 전단을 활용한 그의 초기 작업을 집중 조명했다. 한국적인 팝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대중문화의 전성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환기하는 작업을 해왔다. ‘아토마우스’는 작가가 미국을 대표하는 ‘미키마우스’와 일본을 상징하는 캐릭터 ‘아톰’을 결합해서 만든 고유의 캐릭터이다. 1993년생인 아토마우스는 2019년 9월 27일 방탄소년단(BTS)의 제이홉이 발매한 음원 <치킨 누들 수프>(Chicken Noodle Soup)의 커버에 등장했다. 아토마우스가 형형색색의 연기를 내뿜는 작가의 연작 <스모킹>에 제이홉만의 스타일을 가미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평소 이동기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제이홉의 요청으로 성사된 컬래버레이션이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금천예술공장 입주작가였던 강상우 작가는 1977년생으로 유년시절의 기억을 영감의 원천으로 해 입체, 설치, 페인팅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만화책, 옛날 CF, 1980년대 TV 만화 등 유소년기에 친근했던 소재에 40대의 추억을 더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에는 198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야구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추억의 운동화 브랜드 ‘슈퍼카미트’, SBS 인기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등이 등장한다. 2019년에는 대전테미창작예술센터에 입주해 1980년대 유행한 여성 정장을 주제로 <女子의 變身은 無罪>전을 열었다.
3 강상우 작가의 <女子의 變身은 無罪> 전시 전경.(강상우 제공)
시대를 앞서간 음악의 재발견
지난 8월 6일 개설된 SBS의 유튜브 채널 ‘SBS KPOP CLASSIC’은 1995년 8월부터 2002년 9월까지 방송된 <SBS 인기가요>의 풀 버전을 24시간 스트리밍하며 단시간에 화제를 모았다. 단순히 과거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40대의 X세대부터 10∼20대 중반의 Z세대가 두루 섞여 실시간 채팅을 통해 수다를 떨며 ‘이 가수는 요즘 뭐 하는지’ 안부를 묻고 정보를 공유한다. 이를 통해 당시에는 크게 뜨지 못했던 가수를 발굴하기도 한다. ‘1990년대 지드래곤’으로 불리는 양준일이 대표적이다. 그는 1991년 데뷔해 <리베카>, <가나다라마바사> 등의 곡을 발표했는데, 1992년 12월 발표한 2집까지만 반짝 활동했다. 그의 영상에는 ‘30년이 지나서야 본인의 시대를 찾았다’, ‘노래, 춤, 패션스타일이 2019년에 봐도 촌스럽지 않다’, ‘21세기에서 타임머신 타고 온 시간여행자’ 등 동시대에 접하지 못했던 이들의 찬사와 탄식이 줄을 잇고 있다.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는 가수 김완선도 재조명됐다. 활동 당시 그의 영상을 뒤늦게 접하고 팬이 되었다는 10대들의 댓글이 수두룩하다. 1991년 용인자연농원에서 녹화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영상이 모티브가 되어 28년 만에 에버랜드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시티팝 스타일의 대표 가수 김현철은 13년의 공백을 깨고 2019년 11월 정규 10집을 발표하고 뉴트로 축제에 소환되고 있다. 과거에 만든 세련된 음악 스타일이 새로 인정받으면서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가 아닌 음악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4, 5 가수 김완선의 1991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영상과 2019 뮤직비디오.(출처_유튜브 ‘again가요톱10’, ‘김완선 오피셜’)
백 투 더 1994, 디즈니 앤드 홍콩 어게인
과거로 돌아간 영화들은 1994년에 주목했다. 정지우 감독의 멜로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KBS FM에서 1994년 10월 1일부터 2007년 4월 15일까지 13년간 방송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목으로 했다. 1975년생인 남녀 주인공이 가수 유열이 첫 방송을 시작한 날 만나고, 방송을 통해 다시 인연을 이어가는 등 이 프로그램은 영화에서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벌새> 역시 1994년을 배경으로 한다. 1994년은 기록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이다. 주인공인 대치동 떡집 막내딸이자 중학교 2학년인 은희는 올해 마흔이 되었을 터. 1981년생 김보라 감독의 개인사를 반영했지만 보편적인 감성에 영화가 그린 1994년과 영화가 상영된 2019년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현대사에 길이 남을 대형 사고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현재를 들여다보게 한다.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실사영화로 부활 중이다. 디즈니는 ‘라이브 액션’ 프로젝트를 통해 2017년 <미녀와 야수>(원작 1991년)를 시작으로 올해 <알라딘>(1992년), <라이온 킹>(1994년)에 이어 2020년에는 <뮬란>(1998년)을 개봉할 예정이다. 특히 4DX 신기술로 새롭게 태어난 <알라딘>은 시대 변화를 반영해 달라진 여성상을 제시했다. 1990년대 애니메이션을 본 중년부터 2000년 이후 태어난 Z세대 관객까지 사로잡으며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추억의 홍콩 누아르 명작 <영웅본색>은 한국에서 창작 뮤지컬로 제작되어 12월 17일 초연한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벤허>를 만든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작곡가 콤비가 다시 만나 뮤지컬로 부활시켰다. 원작인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 시리즈는 홍콩 누아르 장르를 개척한 전설적인 작품이다. 1편은 1987년 5월, 2편은 1988년 7월 국내 개봉했는데, 당시 트렌치코트를 입고 성냥개비를 입에 문 주인공 주윤발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국영이 부른 1편의 주제곡 <당년정>(當年情)>, 2편의 주제곡 <분향미래일자>(奔向未來日子)가 뮤지컬 넘버로 재탄생해 2019년의 관객과 만난다.
6 뮤지컬 <영웅본색> 포스터.
7 ‘제9회 서울레코드페어’ 포스터.
X세대와 Z세대를 아우르는 축제
2019년 축제 현장도 뉴트로판이었다. 에버랜드는 뉴트로 콘셉트의 페스티벌 ‘도라온 로라코스타’를 11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했다. 2018년에 이어 2회째로, 1회 ‘월간 로라코스타’ 기간에는 입장객이 전년 대비 약 25% 증가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인 락스빌 지역은 빈티지하게 꾸며 ‘뉴트로 테마존’으로 변신시켰다. 뉴트로 포토 스폿에는 4개의 바퀴가 달린 ‘대형 로-라 스케이트’를 설치해 1980년대 롤라 스케이트장의 추억을 소환했다. 평소 일반인이 참가해 끼와 재능을 선보였던 ‘오픈 스테이지’는 축제 기간 동안에는 복고풍 의상을 입고 2000년대 초반 이전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뉴트로 스페셜’로 운영했다. 인기 많은 놀이기구 입구에는 ‘따블-락스핀’(더블록스핀), ‘밤파카’(범퍼카), ‘챰피온쉽 로데오’(챔피언십 로데오)와 같은 복고 감성의 한글 간판을 붙였다. 에버랜드의 예전 명칭인 ‘용인자연농원’ 시절을 그대로 재현한 자유이용권도 특별 패키지 구매 시 증정했다. 1976년 4월 17일 문을 연 ‘용인자연농원’은 1996년 개장 20주년에 ‘에버랜드’로 명칭을 변경한 바 있다.
X세대부터 Z세대까지 취향과 트렌드를 아우르는 문화축제 ‘XZ페스티벌’은 CJ ENM의 주최로 10월 19일~20일 양일간 서울 노들섬에서 열렸다. 뉴트로를 콘셉트로 한 축제 라인업은 이승환, 김현철, 015B, 김연우와 같은 1990년대 인기 뮤지션에서 헤이즈, 볼빨간사춘기까지 세대 차이를 무색하게 구성했다. 연남동에 있는 빈티지 라이브펍 ‘채널 1969’에서 엄선한 1980~90년대 히트곡의 2019년 리믹스 버전이 논스톱으로 흘러나온 루프탑 파티, 레트로 게임으로 이름난 ‘구닥동’이 진행한 게임 대회와 1980년대 게임기들이 총출동한 장터, 뉴트로 아이템들을 판매한 뉴트로 슈퍼마켓 등이 이틀 동안 노들섬을 들썩이게 했다.
‘제9회 서울레코드페어’는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렸다. 공식 누리집의 축제 소개 문구처럼 ‘새로운 음악과 바이
닐 레코드 같은 오래된 매체, 오래된 음악과 새로운 세대가 어우러지듯,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뉴트로 감성의 축제이다. 2011년 시작해 올해 9회를 맞은 이 축제는 LP 수집 열풍이 젊은 층으로 번지면서 2017년 처음 방문 인원 1만 명을 넘긴 이후 작년에는 2만 명이 넘게 찾는 등 매년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올해 축제 현장에는 영화 <벌새>에도 삽입된 1994년 최고 히트곡,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담긴 7인치 싱글 바이닐이 500매 한정으로 나와 순식간에 품절됐다. 분홍, 보라 두 컬러로 제작된 아트워크는 일러스트레이터 권서영의 작품. 마로니에 외에도 ‘빛과 소금’의 정규앨범 4장을 새로 찍어낸 LP 박스 세트 등 5종의 ‘한정반’은 대기표를 받아 구입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8 에버랜드 ‘도라온 로라코스타’ 홍보 이미지.
9 ‘XZ페스티벌’ 포스터.
촌스러워야 힙하다
과거에는 촌스럽다고 느꼈을 디자인을 뉴트로 감성으로 완성시키는 것 중 하나는 서체이다. 배달의민족은 현재 가장 트렌디한 중구 을지로의 무명의 간판 글씨 장인이 함석판이나 나무판에 붓으로 쓴 글씨를 바탕으로 을지로체를 만들어 10월 9일 한글날에 공개했다. 을지로체 이전에도 아크릴판 위에 시트지를 붙여 칼로 잘라낸 1960~70년대 간판을 모티브로 한 한나체(2012)를 시작으로, 붓으로 직접 그려서 만든 옛날 손글씨 간판의 느낌을 재현한 주아체(2014), 작도 후 아크릴판에 자를 대고 커팅해서 만든 옛 간판을 모티브로 한 도현체(2015) 등 옛날 간판의 정겨움이 묻어나는 서체를 만들어 무료로 배포해왔다.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는 아이스크림도 서체로 나왔다. 빙그레는 윤디자인그룹과 1992년 출시된 장수 아이스크림 ‘메로나’의 로고 디자인을 소재로 ‘빙그레 메로나체’를 선보였다. 2016년 ‘빙그레체 바나나맛우유’와 2017년 ‘빙그레체Ⅱ 투게더’, 2018년 ‘빙그레 따옴체’에 이어, 2019년 내놓은 메로나체는 반듯한 네모 형태로 젊은 느낌의 레트로 감성을 표현했다.
뉴트로’의 유행으로 ◯◯상회, ◯◯다방, ◯◯여관, ◯◯당 등 복고 감성의 상호가 늘어나고, 복고풍으로 디자인한 포스터나 로고도 흔해졌다. 유리로 된 묵직한 주스병을 물병으로 사용하는 음식점이 SNS에서 화제를 모을 정도로 2019년 젊은이들은 촌스러워서 힙한 뉴트로 감성에 열광했다.
10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담긴 싱글 바이닐.
11 배달의민족이 만든 을지로체. (출처_배달의민족 누리집)
- 글 전민정_객원 편집위원